오늘의 묵상

(시편 13:1~6)⓶[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꽈벼기 2020. 5. 13. 07:36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시편 13:1~6)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탄식합니다. ‘어느 때까지라는 말이 2절까지 네 번이나 나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고통을 짐작합니다. 대적들은 득세하고 자신은 극심한 질병에 걸린 고통스러운 현실을 보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잊고 있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래서 부르짖습니다.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떠난 염려나 불신앙적인 마음의 고통이 아니라 깨달음과 은혜가 입혀진 신앙훈련 같은 것을 느낍니다.

 

영혼이 번민합니다. 깊은 생각에 빠져있습니다. 고통에 대한 잡다한 생각들, 회의적인 시각이 앞을 가립니다. 따지고 보면 쓸데없는 생각이었고 고통만 가중하는 것이었습니다. 근심의 나날이 오히려 딱해 보였습니다. 이것을 안 원수들은 더욱 기뻐 날뛸 것입니다. 그들은 고통당하는 다윗을 독설로 비난하는 것이 취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들을 견디지 못해 간구합니다. 회의와 탄식이 엄습해 오기 때문입니다. 동정과 시전을 끌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입니다. 응답을 받는 것조차 어느 때일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기다림에 지친 듯 흐려진 눈을 밝혀 달라고 간구합니다.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려워서이고, 원수들이 이기게 될까 두려워서 이기도 하며, 대적자들이 기뻐할까 하여 건강의 회복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의 빛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할 때는 극도로 악화한 건강 상태로 죽음을 맛보듯 하다는 것입니다.

 

나의 원수는 인생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의인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나의 대적들은 다윗의 일반적인 정적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흔들릴 때는이란 죽음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고 환란 때에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럴 때 대적들은 기뻐합니다. 영적 뱃멀미 같았던 상태에서 평온한 항해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 적인 사랑에 대한 확신이 이었기에 그 큰 고통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주의 구원이 아직 임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너무나 확고한 소망 가운데 이 구원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이 극한 시련과 고통 가운데서도 절대 좌절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다윗은 기도 중에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대한 확신을 얻고 탄식에서 찬송으로 전환합니다. 선이든 악이든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갚아 주신다는 말입니다. 다윗에게는 선으로 보상해 주신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다만 순종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나타냅니다.

 

참된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복을 확신하는 것이며 이곳에서의 찬송은 참된 영적인 사실에 근거할 때 비로소 지속적일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해결될 일을 기도하지 않으므로 죄짓고 모든 일을 어렵게 이끌어 가는 어리석음을 벗어나야 함을 깨닫습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노래로 주님을 찬송하면 다시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노래가 되어 얼굴에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자기 영혼을 기도 속에 듬뿍 적신 사람들은 모든 고민을 조용히 견딜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들을 돌아보는지 새삼 생각해 봅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게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