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꽈벼기 2019. 11. 6. 07:35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시편 137:1~9)

 

1~3, 바벨론 강변에서의 슬픔을 애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본 단락은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나라 잃은 설움에 가슴 아파 우는 장면이 1절에서, 비통하게 울고 있는 이유를 해명하는 부문이 2, 3절에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바벨론은 하나의 성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 전체를 일컫는 말로써 유대인들은 이 제국의 유브라데스 강이라든지 혹은 티그리스 강의 여러 지류와 운하에 모여 나라를 빼앗긴 설움과 고통을 생각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 중의 감시를 벗어나 한적한 강변으로 와서 과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서 누리던 즐거움을 회상하면서 기도와 찬양을 위해 모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난날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하는 데에 쓰이던 수금은 조용히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적들은 조롱하듯이 그들에게 할 수 없음을 단호하게 천명합니다. 찬송은 절대 인간을 대상으로 해서 부른다거나 세상 행사의 장식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시인은 바벨론의 고통 속에서도 신앙적 순결성을 고수하려는 노력을 끝까지 견지하였습니다.

 

4~6, 우상을 섬기며 불의를 행한 결과 비참한 포로 상태로 전락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애도하던 시인은 이제 예루살렘에 대한 불변의 사랑을 고백합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을 잊어버리고 바벨론의 압제자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악기를 연주하느니 차라리 모든 재주를 빼앗기는 편을 선택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서원은 예루살렘에 대한 전적 헌신의 표현임과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표명입니다.

 

시인은 어떤 경우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제사드리던 기억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더구나 시인은 바벨론을 이방으로 표현함으로써 이 바벨론이 자신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아닌 잠시 들른 장소에 불과하며 언젠가는 다시 고향, 즉 축복의 땅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망을 암시하여 줍니다.

 

7~9, 앞에서 포로 생활의 비통함과 예루살렘에 대한 사랑을 극적으로 표현한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대적인 에돔과 바벨론에 대한 극렬한 저주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에돔 족속은 에서의 후손으로서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형제였지만 이스라엘에 대해 증오와 시기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자신들을 직접 침략한 바벨론 보다 먼저 에돔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야비한 행동을 취했던 에돔에 대한 특별한 증오심을 반영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화재가 일어났을 때는 서둘러 진화 작업을 해야 하듯이, 교회가 환란에 휩싸이게 되었을 때에 그 불길을 끄도록 힘써야 합니다. 물론 그 방책은 기도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예전의 평화를 상기하고, 원수에게 받는 수모를 절감하면서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는 때를 바라는 일들도 잊어선 안 되겠습니다.

 

그동안의 나의 삶과 요즘의 나의 삶을 돌아보며 나는 내 생활에서 사단이 어떻게 역사했는지를 실감합니다. 세속 사회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의식을 유지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