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요한복음 11:17~27)③[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꽈벼기 2022. 2. 6. 09:17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17~27)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베다니에 도착하십니다. 이미 상황은 상당히 진전되어 많은 유대인이 조문하러 와 있었습니다. ‘많은 유대인이란 말은 예수에게 있어서 수난의 사역지인 예루살렘에 그만큼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이 염려한 긴장감을 한층 더 해줍니다.

 

여기에서 많은 유대인은 지금까지 본서에 비친 성격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들은 예수의 마지막 표적을 보고 결국은 신앙을 소유하게 되는 복된 부류의 사람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사로와 한 형제지간인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교하는 일은 흥미 있는 일입니다. 마르다는 마리아보다 훨씬 활동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수의 도착 소식을 들은 마르다는 곧 나와 그를 맞이하였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집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 역시 예수께서 찾으신다는 소리를 전해들은 즉시 나가 그의 발아래 엎드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누가복음 기사에서도 마르다는 그의 활달한 성격답게 손님들의 영접 준비로 매우 분주한 형편이지만, 마리아는 예수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간의 유사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예수를 만났을 때의 인사말은 서로 거의 비슷합니다. 서로가 나사로의 죽음이 예수께서 제때 없었다는 이유로 애석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께 대한 마르다의 신앙 고백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마르다에게 있어서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르다의 고백은 마치 베드로의 고백을 연상케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고백할 때의 전형적인 모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의 고백이 완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종말론적인 부활과 영생은 믿었지만, 지금 이 순간 예수께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능력이 있음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예수 자신이 생명이요, 부활이란 사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마르다의 고백은 마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인한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던 점입니다. 그렇지마는 예수는 마르다의 종말론적 부활에 대한 제한된 고백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마르다의 제한된 신앙 고백을 용납하시되 한층 더 깊은 진리로 유도하십니다. 곧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란 사실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지도 방법은 요한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

 

예수께서 도착한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입니다. 예수를 맞이한 마르다의 인사말 속에는 좌절과 믿음이 섞여져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약속하심으로 마르다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믿음으로 의심을 이겨냈습니다.

 

주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로 결국에는 승리하실 것을 믿습니다. 변치 않는 믿음을 소유함으로 평생토록 주님과 동행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