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버지의 일을 행하거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계심을 깨달아 알리라]
(요한복음 10:22~42)③
22~30절, 여기에 수록된 예수와 유대인들 간에 벌어진 논쟁은 유대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수전절 절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수전절은 B.C. 165년경에 유대 마카비우스의 승리와 공적을 기념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가 셀류쿠스 군에 승리한 것과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하여 성전이 헬라 잡신들의 제단으로 더럽혀진 것을 청결하게 새로이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의 제단을 성별하여 재봉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수전절은 상실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된 구원의 절기입니다. 잃었던 국권을 회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는 의미가 있는 중요한 시기에 예수는 구원의 주권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며 예언된 메시아이신 구원자로서 불신앙적인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를 믿지 않았으므로 예수께서는 결국 그들을 떠납니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구원의 시기를 상실하였으며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때에 구원자를 믿음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속 사업은 여기서 마감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를 거부한 이스라엘이 구원의 기회를 상실함으로써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예수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백성들의 새 언약 공동체가 세워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서 중요한 변환이며 이방인들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은총으로 절망 속에서 빛을 얻는 희망의 절기가 임하였음을 의미합니다.
24절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질문 태도는 자못 심각합니다. 그들의 감정은 매우 절대적이며 도전적입니다. 걸어가시는 예수의 주위를 둘러싼 그들의 관심은 ‘과연 예수가 그리스도이나?’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한 예수의 분명한 답변을 요구하였으나 사실상 예수께서는 그들의 관심에 대해서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는 않으셨습니다.
혼란스러운 유대인들은 속 시원한 대답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유대인들을 의혹케 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수차례 밝힌 바 있으며 그의 사역 자체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임을 충분히 증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와 그의 사역을 보고서도 의혹이 남아 있었던 것은 그들의 잘못된 메시아관 때문입니다.
이렇듯 그들이 예수를 알지 못했던 것은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는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양만이 메시아이신 그의 음성을 듣고 알 수 있습니다. 곧 폭발할 것 같은 기세와 잔뜩 고조된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예수와 유대인들의 논쟁은 바야흐로 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를 직접적으로 적용한 데서 시작하여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예수의 폭탄선언에 이르러서는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 상황 전개는 결정적으로 구원의 기회가 그들에게서 떠나가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25~30절에서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인지에 대한 유대인의 질문에 대하여 ‘선한 목자’ 모델로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목자는 ‘자기의 양’을 잘 알 뿐만 아니라 그 양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립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는 자기의 양에게 영생을 주시며 아무도 그를 해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양들을 주신 분이 예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는 아버지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인 예수의 능력과 사역은 그가 메시아임을 충분히 증명해 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고 따르는 양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짐을 보증해 주고도 남습니다.
31~39절,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것을 두고 유대인들이 신성 모독으로 판단하여 돌을 들어 치려고 한 시점에 나온 예수님의 답변이 34절~38절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공개적으로 신성 모독죄를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예수의 행하신 사역 때문이 아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예수의 공개적인 자기 선언 때문에 비롯됩니다.
특별히 예수는 여기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대답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인용하신 시편 82편 6절에 기록된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의 임금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 즉 사사로 부름 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신’이란 말씀을 인용한 것은 자신을 인간과 같은 범주로 분류하시려고 한 의도는 아닙니다. 구약 시대의 ‘신’은 인간이 신이라고 불린 것에 불과하지만, 본문에 기록된 ‘신’은 인간으로서 세상에 파송한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의 말씀 요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백성을 치리하는 자들을 ‘신’이라고 불렀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많이 한 예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처럼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자신의 신성을 계시하신 것은 형식주의적인 유대인들이 최고로 여기는 구약성경을 인용함으로써 그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공박하신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40~42절, 반복되는 예수의 교훈과 말씀에도 불구하고 불신앙으로 눈이 먼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전혀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급기야는 예수를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의 핍박을 피해 사역지를 잠시 요단강 동편 베레아로 옮겼습니다.
당시의 베레아는 헤롯 안티파스가 통치하던 지역이었으므로 빌라도의 지배하에 있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베레아 지방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곳에 계시는 동안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비교적 안전한 생활 가운데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구원의 기회가 유대인들에게서 떠나 이방지역으로 옮겨지는 것을 뜻하는지 모릅니다.
♦선한 목자요, 전능자요, 구원자로 찾아오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때라야 참 기쁨과 소망과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조용한 가운데서 들려오는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힘써 길 원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세상 음성에 미혹 받게 됩니다. 미혹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조용한 가운데서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의 음성을 듣고 기도 가운데서 그의 음성을 듣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장이 헛되지 않도록 삶으로 증명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주장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믿을 충분한 기회를 주셨지만 유대인들은 완강하게 주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거절하는 집이나 마을을 떠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만족을 누리길 원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신앙과 삶이 조화를 이루어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의 자녀 됨을 나타내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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