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누가복음 15:11~32)[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꽈벼기 2021. 2. 18. 08:16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누가복음 15:11~32)

 

11~24, 잃은 드라크마 비유와 함께 사복음서 중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복음의 핵심적 메시지인 회개와 구원에 대한 어느 곳보다도 아름답고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죄인이 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가? 라는 측면에서 많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탕자는 어느 특정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님 앞에 한결같이 죄인인 우리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탕자는 그의 아버지의 권위에 대하여 무조건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으며, 일반적 관습과 법적 절차를 무시한 채 자기 의사대로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의 욕구는 타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통제를 벗어나 육적 쾌락을 추구하고자 했던 탕자의 욕구는 인간의 이기적 소욕에만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그릇된 것이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갔듯이 타락한 인생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하며 그 은총의 길에서 떠나려고 하는 본성을 지녔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기 의사대로 하는 소치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가리켜서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의지대로 하려고 하는 본성을 지닌바, 하나님 앞에 같은 죄인입니다.

 

탕자가 자신의 이권을 아버지에게 주장했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악의 씨앗이 트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품을 떠났을 때 그가 겪은 모든 고통과 수고는 자기 의지대로 한 죄의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 의지가 있는 한,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행복과 안식을 얻을 수 없으며, 참된 자유와 기쁨도 누릴 수 없습니다.

 

탕자에게서 전형적인 죄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모범적인 회개 자의 모습도 더불어 볼 수 있습니다. 모범적이란 그가 회개하게 되는 과정에서가 아니라 아버지 앞에 돌아온 그의 태도와 고백에서 그러합니다. 탕자가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아버지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게 된 것은 그가 겪었던 비참한 고통에서 비롯됩니다.

 

아버지 앞에 돌아온 탕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그 자신이 저지른 모든 범죄 행위가 오직 자기 잘못에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이처럼 타인에게 돌을 던지지 아니하고 자기 잘못만을 내세우며 간절히 아버지께 자비를 구하는 탕자의 태도는 상한 심령으로 저지른 죄를 슬퍼하며 크게 뉘우치는 모범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회개의 참된 자세는 자신의 전적 책임성을 자각함과 아울러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사람 앞에서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은 곧 솔직한 겸손의 표시이며 낮추는 것이니 이는 참다운 회개 자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자기 의지대로 아버지를 떠난 것과 대조적으로 이제는 아버지의 품꾼 중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권위와 뜻을 무시했을 때 그의 불행이 시작되었으나 다시금 아버지의 권위와 뜻에 순종하고자 했을 때 그는 불행에서 벗어나고 대신 아버지 안에서 아들의 권리를 회복하고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5~32, 이례적으로 맏아들의 냉혹한 태도를 다룸으로써 또 다른 의미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맏아들은 회개할 것이 없는 자로서 둘째 아들에게 무조건으로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가 베풀어진 점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였는데, 맏아들의 이러한 태도는 아버지에 의해 제지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두 아들의 대립한 상황을 두고 해석하기를 둘째 아들은 세리나 죄인, 더 나아가 이방인과 같이 뒤늦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을 가리키며, 맏아들은 이런 사죄의 은총에 대하여 못 마땅히 여긴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전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러한 알레고리는 가능하지만, 알레고리 자체에만 관심을 두면 그 광의적 의미가 간과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둘째 아들과 맏아들은 오늘날 구원을 얻은 성도들 모두에게 한결같이 적용되는 대표자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둘째 아들은 영적, 도덕적으로 소생한 데 반해 맏아들은 오히려 퇴보, 타락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런데도 하나님께선 여전히 양자를 똑같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맏아들은 집에서 잃어버린 아들 같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집을 떠나지 않았지만, 형식상으로는 아버지를 섬겼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체면과 도덕적인 의무감 때문이었지 마음에서부터 아버지를 사랑하는 공경은 아니었습니다. 탕자는 몸으로는 떠났지만, 마음만은 떠나지 않았다고 보입니다. 결국은 돌아왔습니다.

 

형제애가 없어 보입니다. 잃었던 자식을 다시 찾은 기쁨 때문에 집에서는 잔치를 베풀고 즐거워하는데, 들에서 온 그의 형은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노하여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동생이 살아서 돌아왔으나 이유야 어떻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마땅한 일인데도 형제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에 불쾌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동생이 가산을 탕진했다는 이유와 자기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았다는 이유, 그리고 잔치하면서 살찐 송아지를 잡았다는 이유는 물질과 관계가 됩니다. 아버지는 내 것이 전부 네 것이다라고 합니다. 물질로 타이릅니다. 오늘날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기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외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어서 돌아만 오라고 외치십니다. 당신의 품 안에 거하며 풍성한 복과 은혜를 누리길 원하십니다. 나간 자식이 어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고 돌아오기만 하면 무조건 용서를 베풀기 원하십니다. 아직도 세파의 온갖 장벽으로 인해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님의 넓은 사랑의 품 안에 돌아가는 기회를 미루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고는 자신을 종처럼 여겼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이 아닌 단지 의무감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면, 우리는 맏아들처럼 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기에 아버지의 것이 자기 것이고 언제든지 그것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는 쓸 것을 구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기쁨으로 맞이해야 할 동생에게 시기와 질투가 생겼습니다. 기쁨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세상 것들의 공허한 약속을 얻으려고 애써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나의 삶 첫 자리를 주님께 바치오니 주님께서 주관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주안에서 형제와 자매 된 이들에게서 기쁨이 넘치길 원합니다. 나의 마음이 분노와 죄악으로 얽매여 있지 않기를 도움받기 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