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꽈벼기 2019. 2. 23. 16:36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태복음 14:22~36)

 

22~36절은 오병 이어의 이적과 마찬가지로 본문 또한 예수께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합니다. 이는 본서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예수의 자기 계시 혹은 자기 증거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한마디 말씀으로써 잠잠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으신 나그네의 삶을 살며 대적들의 멸시와 핍박을 받고서 마침내 십자가 형틀에 달리셨던 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당신이셨다는 사실은 믿음의 눈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는 역설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증거입니다.

 

본문은 또한 제자 되기 위한 훈련이라는 큰 주제와 각별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본 기사의 절정은 폭풍을 잔잔하게 하신 사실보다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제자들의 고백에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 속에 나타났고 예수께서 자신을 아들이라 하신 말씀 속에서도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이 칭호로써 예수님을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물론 당시 제자들이 이 칭호의 진정한 본체론적 의미를 이해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대한 제자들의 인식이 점차 발전되어갔다는 점은 분명히 지적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초석이 될 만한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고서도 그 직후에 호된 책망을 받은 베드로의 경우를 보더라도 제자들의 예수께 대한 이해의 수준이 점진적으로 깊어가기는 하였으나 항상 불완전하고 미흡한 상태를 벗어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제자들의 점진된 신앙성장과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베드로의 과감한 신앙적 도전이 우리의 시선을 끕니다. 28~31절은 제자 중 베드로의 모습이 주목받은 세 가지 경우 가운데 첫 번째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절한 시기와 상황에 맞추어 제자들에게 신앙 훈련을 계속 실시해 오셨으며 심지어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행사신 같은 권능이 위임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풍랑을 넘어 태연하게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격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행하고자 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본문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은 무수한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듭한 연후에야 비로소 굳건한 신앙인으로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34~36절 같이 예수님께서 갈릴리 건너편 북동쪽에 자리 잡은 게네사렛 지방에서 많은 병자를 고치셨다는 짤막한 기사로 끝을 맺습니다. 이 기사는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범위가 온 유대 전역에까지 미쳤음을 뜻합니다. 대적들의 핍박이 가열됨에 따라 열두 제자들을 훈련하는 일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이 더욱 각별해졌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예수님의 사역이 그들에게만 한정되지는 않았으며, 온 백성들에게까지 미쳤던 것입니다. 한편 바리새파나 엣세네파와 같은 엄격한 유대 종파들은 병자와 접촉되는 것을 부정하게 생각하였던바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병자들의 모습을 보았다면 의당 예수님을 비난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결법에 대한 예수의 무관심한 듯한 태도는 곧바로 이어지는 15장에서 논쟁할 것이라는 암시를 받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호수 중간에서 역풍을 만난 제자들은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오늘을 사는 모든 성도에 같게 직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를 저어 가다가 역풍을 만나는 것은 곧 인생 항해 중의 열악한 여건을 예시해 줍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결코 자녀들을 버리지 않고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요컨대 주님은 우리가 가장 조악한 환경에 처하게 될 때 주님의 시간에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위기 중에서 구출해 주십니다.

 

나는 나의 능력이나 사고방식에 의지하지 않고 온전히 주님께 의지하길 원합니다. 좀 더 깊은 기도 생활로 주님을 닮아 나의 연약함을 극복하기를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