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꽈벼기 2019. 2. 24. 15:30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마태복음 15:21~39)

 

21~28, 예수님께서 만백성의 구주되심과 따라서 비단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예수를 주()리라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문이 개방되어 있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왜곡된 특권 의식이나 편협한 민족주의에 대해 분명히 쐐기를 박은 사건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사역 대상을 일차적으로 유대인들로 한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완성된 구원의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대뿐만 아니라 장차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거될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복음의 우주적 성격은 영원 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따른 것이며 구약성경에서도 곳곳에 그러한 암시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르심 받은 바울에 의해 이방인 선교는 본격적인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한편 앞 단락에는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대적하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으며 유대인들은 선민으로서 부여받은 우선적 특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해서나 하나님에 관해서 오해 내지는 곡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작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와 그 복음을 접하고서도 오히려 배척하였습니다.

 

이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되는 비밀스러운 섭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고, 계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방인 구원에 대한 비전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완악하고 위헌적인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여기 나오는 가나안 여인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전격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과 주로 고백한 것과 여러 가지 장애 요인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간구한 것은 그녀의 큰 믿음을 반영합니다. 이러한 고백 속에 함축된 예수님께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는지는 다소 불확실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스스로 죄인임을 기꺼이 시인하는 겸손함과 진실함을 보였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한 세리처럼 그녀는 오직 예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만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녀의 간절한 간구가 돋보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의 경시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나아왔으며, 시험 삼아 던진 예수의 냉담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매어 달렸습니다. 이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청원한 결과 마침내 소원을 이룬 과부에 관한 비유를 연상시킵니다.

 

우리는 이 가나안 여인에게서 믿음의 인내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했던 얍복 강변의 야곱과도 같이 그녀는 소망이 더디 이루어진다고 해서 절대 낙망하지 않고 예수께 끈기 있게 간구하였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개들에 빗댄 것이나 이 여인의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시는 듯한 태도를 보이신 것은 그녀가 이방 여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부르짖는 여인의 믿음을 연단 삼아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29~39, 32~39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명 이상을 먹이신 기적의 사건입니다. 특히 우리는 이 기적이 이방 땅에서 행해졌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 단락에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예수님의 공생애 대부분은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위한 사역에 할애되었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세계 만민에게로 늘 향해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많은 학자는 본 기적을 오병이어 기적과 같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두 기적 모두가 광야에서 일어났으며,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떡을 떼셨고 또한 제자들에 의해 음식이 분배되었다는 점 등에서 두 기적이 서로 유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따지면 그 독자성은 확실히 차이가 드러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마찬가지로 본문의 기적 또한 메시아의 자기계시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창조의 권능을 지닌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본문에서 강조된 것은 바로 영육 간에 굶주린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사랑입니다.

 

당시 예수님 앞에 모여든 무리는 대부분 질병을 치유 받거나 기타 육신상의 결핍된 욕망을 충족 받고자 하는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영혼의 질병과 기아 상태를 더 염려하신 것은 물론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육신 상의 결핍된 욕망을 절대 방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칠 병 이 어의 기적을 직접 체험한 사람 중에는 아마도 훗날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참 생명의 떡이심을 깨닫게 된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고 마치 때를 따라 비를 내시시듯이 적절한 시기에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또한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써 사천 명 이상이 배불리 먹고도 일곱 광주리나 가득 남았다는 사실은 만유의 주(), 지극히 충만하신 주께서 성도들의 필요를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이 음식을 나누어 주게 하신 궁극적 이유는 영적 기아에 시달리는 무리에게 영의 양식을 공급해야할 제자들의 사명을 깨우치시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전후 문맥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직도 제자들은 주님의 이렇듯 깊으신 의도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얼마 전에 주께서 오병이어로써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분명히 목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음식을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으면서도 제자들은 어디서 떡을 구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거짓되고 악한 교훈을 누룩에 비유했을 때 제자들은 일곱 광주리에 가득 남았던 떡을 가져오지 아니한 사실로 걱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떡만을 구하는 무리의 영적 암매를 꾸짖으신 바 있거니와 비단 일반 민중들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이서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 기적적 권능을 무수히 체험한 제자들마저 세상 적이며 물질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완악함과 어둔함의 뿌리가 얼마나 깊으며 죄악으로 말미암은 병폐가 또 얼마나 고질적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지나침은 이방 여인의 믿음을 크게 만들고자 그처럼 큰 시련을 주신 것 같습니다. 요컨대 담금질 없는 제련은 없는 법입니다. 그런 까닭에 시련이 클수록 큰 믿음을 만들어 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바로 저런 방법으로 자녀들을 연단하신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경우 큰 시련을 받으면서도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것은 대개 그런 일을 자기 연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만 자포자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주를 신뢰함으로써 큰 역사를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한 사람을 영원한 저주에서 구원하는 일에 비해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일이 부차적일지는 모르나 결코 무관심해도 좋은 일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으며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연민의 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 쉽게 포기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모든 사람이 다 누리지는 못하고 오직 믿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좀 더 간절하고 끈질긴 마음으로 믿음의 기도를 드리기를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이웃을 위해 사랑과 연민의 정을 나타내길 원합니다.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