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꽈벼기 2016. 1. 16. 08:28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누가복음 5:12~26)

 

이스라엘 사회에서 문둥병은 하나님의 저주로 말미암은 치명적인 질병으로 여겨졌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육체적으로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고통을 당했음을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는 가정과 지역 공동체를 떠나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으므로, 그 고통이란 너무도 심한 너무도 심한 것이었습니다.

 

이토록 무시무시한 질병을 한마디 말씀으로 낫게 하신 사실은 예수의 신적 권능을 여실히 입증합니다. 또한, 중풍병자를 치유하면서 주님은 단순히 중풍 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고려할 때 중풍 병자 치유 기사는 예수의 신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율법 상으로 볼 때 문둥병자와 접촉한 자를 역시 부정하게 여겨졌습니다. 모든 사람에 의해 기피되고 소외당했던 문둥병자와 수치를 당하고 자신도 쓰라린 자멸감에 빠진 자에게 크신 긍휼과 자비의 손길을 뻗치셨습니다. 영적 측면에서 볼 때 예수의 피로 씻음 받지 못한 모든 사람은 멸망의 날만 기다리는 영적 문둥병자에 다름 아닙니다.

 

죄의 허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예수는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시되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또한 용서받지 못할 사람을 용서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정신인 것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인생의 육체적 고통보다 영혼의 질병과 저주 상태를 더욱 불쌍히 여기셨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치유 이적을 베푸신 분 곧 예수님의 처지에서 볼 때, 이 이적들은 예수의 메시아 권능을 입증해 보이기 위한 목적과 병자들에 대한 긍휼의 동기에서 주권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반면에 이러한 치유의 은혜를 받는 병자의 측면에서 보면 믿음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믿음을 성장시키게 하는 것 자체가, 예수께서 이적을 베푸신 목적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은혜를 갈구하는 문둥병자의 말 속에서 주님의 뜻을 중히 여기는 믿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예수께 신적 권능이 함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다만 주께서 자기를 긍휼히 여겨 주시기만을 간절히 구했던 것입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에게서 우리는 믿음의 중요한 일면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어떠한 장애에 부딪혀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끝내 주의 도우시는 은혜를 받고자 하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은 중풍 병에 걸린 친구를 예수 앞으로 데리고 가려 했으나 운집한 무리 때문에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체면과 염치를 생각지 않고 집주인의 예상되는 노여움도 일단 뒤로하고 지붕의 기와를 벗겨내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과감한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이적 적 권능을 확신했기 때문이며 병고로 시달리는 친구의 절박한 처지를 마치 자기 일처럼 느끼는 사랑의 정신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병자를 고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 대신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치유의 능력이 널리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목적을 벗어나게 하려는 유혹이 커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병을 고쳐준 사람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도 능력을 보이신 것입니다. 또한, 죄를 용서해 주시는 능력도 있습니다. 우린 지금 당장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절대 내 소욕을 따르지 않도록 원합니다. 병 고침을 받기를 원하면 먼저 고백할 죄를 하나님께 고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나의 영혼의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찬양합니다. 죄 가운데 빠져 있는 나를 돌아보시고 주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죄의 근원들을 제거해 주시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