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꽈벼기 2016. 1. 17. 08:4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누가복음 5:27~39)

 

예수께서 세리 출신인 레위를 부르신 것은 당시 사회적 멸시와 비난의 대상이었던 세리를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부르신 장면이 소개됩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자신의 죄악을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는 모든 죄에서 놓여 날 수 있으며 또한 그의 신분과 처지에 상관없이 주의 제자로서 복음 사역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음을 증거합니다. 죄악된 과거를 청산하고서 제자의 길로 과감히 전향하는 세리 마태의 모습은 예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모습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레위는 소극적 측면에서는 모든 것을 버리며또 적극적 측면에서는 즉시고 일어나 주를 좇음으로써제자 도의 모범이 됩니다.

 

베드로가 제자로 부르심 받은 기사 다음에 두 가지 치유 이적에 관한 기사가 뒤따른 것과 유사하게 이제 레위가 부르심을 받은 후에도 두 가지 논쟁이 수록됨으로써 전후 내용이 구조적 유사성을 보입니다.

 

30~32절에서는 세리와 함께 식사하신 사실에 대한 대적들의 비난과 이에 대한 예수의 변론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곧 서로를 받아들임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세리들은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매국노, 창녀 등과 다름없는 죄인취급을 당했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비난한 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을 외모나 신분에 따라 보지 않고 그 중심에 따라 판단하였으며, 또한 드러난 죄악뿐만 아니라 인생의 전 존재를 삼키고 있는 본질적인 죄를 염두에 두고서 회개를 강조하였습니다.

 

반면에 대적들은 외면적 율법 형식의 준수 여부에 따라 피상적으로 의인과 죄인을 구별하였으며, 그들 스스로 의인으로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당시 유대사회의 소외층이나 죄인으로 분류되던 무리에 비해 회개의 가능성이 훨씬 희박하였고, 이러한 완악 성과 교만은 예수님에 의해 신랄 하게 경고받았습니다.

 

33~39절에 수록된 두 번째 논쟁은 금식 논쟁이 심화하여가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적의를 보여줍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금식의 원래적 의의와 목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금식이라고 하는 형식 자체에만 매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들의 비난에 대해 예수는 신랑과 친구, 새 옷 조각과 낡은 옷 그리고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 등의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유대교의 형식주의적 외식과 종교 체제로써는 생명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을 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인 가운데 거하시는 임마누엘의 사랑, 죄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희생적인 사랑, 그리고 나아가 죄인들에게 의로운 새 생명을 부여하시는 놀라운 축복을 예수와 죄인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상고하였습니다.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어디서도 오아시스를 찾을 길 없는 사막처럼 삭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는 가히 말세 끝에 될 현상 중 하나, 곧 사랑의 고갈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계속해서 성령으로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복종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 됨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나를 내어 맡길 수 있기를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