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멩이와 편지 돌멩이와 편지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눈송이가 몇 날아온 뒤에 도착했습니다 편지지가 없는 편지입니다 편지봉투가 없는 편지입니다 언제 보냈는지 모르는 편지입니다 발신자도 없는 편지입니다 수신자도 없는 편지입니다 한 마리 새가 날아간 뒤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 것을 알았.. 가슴으로 읽는 시 2015.01.14
겨울 아침의 역사 겨울 아침의 역사 겨울이 오면 이 땅의 어머니들은 누구나 한두 번쯤 아침 밥상을 차리다 말고 무슨 액땜이라도 하는 양, "야, 밤새 눈이 하얗게 쌓였네" 하고 들릴락말락하게 내뱉는다. 그릇 부딪는 소리, 얌전한 도마 소리에 취해 두툼한 솜이불 한 귀퉁이씩 붙들고 늦잠을 즐기던 아이.. 가슴으로 읽는 시 2015.01.06
산 그림자 산 그림자 그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래도 그에게 온갖 이야기를 털어놓고 간다 자신의 비밀과 허물을 뱀처럼 벗어 놓고서 다행히 그에겐 모든 걸 숨겨 줄 깊은 골짜기가 있다 그런 그가 깊고 조용한 그녀를 보는 순간 그동안 가슴에 쌓인 응어리를 다 풀어놓고 싶.. 가슴으로 읽는 시 2014.12.24
엄마와 딸 엄마와 딸 "나 혼자 얼마나 쓰겠냐?" 아껴둔 냄비, 수세미 행주까지 싸 주시는 외할머니. "어머니 두고 쓰세요." 엄마는 가만 밀어 놓는다. "나 혼자 얼마나 먹겠냐?" 배 한 개 사과 두 알 꼭꼭 싸 주시는 외할머니. "뒀다, 어머니 드세요." 엄마는 도로 꺼내 놓는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 마.. 가슴으로 읽는 시 2014.12.24
그리움 그리움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우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 가슴으로 읽는 시 2014.12.24
독서 독서 나는 가끔 소리 내 책을 읽는다. 그러다 갑자기 울컥 해서 목이 멜 때가 있다. 무슨 슬픈 장면이어서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방에 누워 책을 소리 내 읽고 있는데 뒤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계시던 어머니가 어느 대목에선가 쯧쯧 딱하지, 하고 혀를 차셨다. 그 소리가 책 읽고 있는 .. 가슴으로 읽는 시 2014.12.13
아직 아직 너에게 내 사랑을 함빡 주지 못했으니 너는 아직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 사랑을 너에게 함빡 주는 것이다 보라 새 한 마리, 꽃 한 송이도 그들의 사랑을 함빡 주고 가지 않느냐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은 그들의 사랑이 소진됐을 때 재처럼 사그라.. 가슴으로 읽는 시 2014.12.13
코끼리 그늘로부터 잔디 코끼리 그늘로부터 잔디 코끼리는 간다 들판을 지나 늪지대를 건너 왔던 곳을 향해 줄줄이 줄을 지어 기만가만 가다 보면 잔디도 밟겠지 어두워졌다가 밝아 졌다가 발아래 잔디도 그늘이 되겠지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속으로 속으로 혼잣말을 하면서 나아갔다.. 가슴으로 읽는 시 2014.11.27
건너편 가을 건너편 가을 비가 그치고 늦가을 바람이 분다 어제보다 조금 더 눈이 맑고 주머니가 많은 바람이 분다 집 앞 오래된 은행나무 숲을 쓰다듬으며 가을이 동쪽으로 기울어진 소리를 내며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오전에 나갔던 길을 되짚어 은행나무 숲길로 돌아오는 사람 오늘은 바람이 불고.. 가슴으로 읽는 시 2014.10.29
열쇠 열쇠 자주 엉뚱한 곳에 꾲혀 있다 달려도 친구도 가구도 수평선도 라일락나무도 심장도 뱃고동 소리도 발소리도 저주도 언제나 제 집에 딱 꽂히지 않는다 바늘이 무던함을 배워 열쇠가 되었다는데 미간을 사용하지 말자 구름을 사용하지 말자 나뭇잎을 사용하자 귓바퀴를 사용하자 -.. 가슴으로 읽는 시 2014.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