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욥기 16:1~17②)[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구나]

꽈벼기 2023. 11. 21. 17:48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구나]

(욥기 16:1~17)

 

1~5절 욥은 친구들의 권고가 폐쇄적인 인과응보 교리에만 집착되어 있어서 도무지 예외를 인정치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욥은 자신이 이제 어떤 말을 할지라도 그 말들은 친구들의 그릇된 판단을 확증할 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결론 때문에 욥은 자신의 무죄에 대한 변명을 중지하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친구들을 비평합니다.

 

사실 욥이 이런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친구들의 권고와 위로의 말이 심오한 깨달음을 주거나 깊이 있는 통찰력을 주는 말이기 보다는 인과응보 논리에 입각한 피상적인 권고들뿐이어서 욥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친구들에 대한 욥의 불평은 더욱더 완전하고 의로운 대상인 하나님을 향한 불평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6~16절 욥은 친구들을 향해 자신의 격분된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자신이 그들과 동일하게 편협한 자임을 인정하는 것임을 알고 난 후 불평의 대상을 하나님께로 전환합니다. 본 구절에서 그는 하나님을 향해 무시무시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찢음’, ‘이를 갊’, ‘꺾으심’, ‘콩팥들을 뚫고, 쓸개가 땅에 흘러나오게등의 표현을 통해서 욥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의 섭리가 자신에게 엄청나게 고통스러움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비탄에 젖은 욥이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토로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욥은 본 구절에서 자신의 대적이 하나님일 수 있다는 극단적 추리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창조해 준 이성을 좇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해결할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 들게 된 욥은 자신의 대적이 하나님일 수 있다는 두렵고도 무서운 가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가상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욥이 당한 고통의 가중함 때문입니다.

 

사실 욥은 그의 가족의 흩어짐, 병과 고통으로 쇠약해진 육신, 자신을 학대하는 주위의 사람들, 대적의 손에 자신이 붙여지는 등의 불행한 환경 가운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외부적 환경의 처참함과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 때문에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대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변론에 대한 답변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논리를 강하게 반대하는 욥의 답변을 통해서 하나님께 있는 의와 죄인에게 베푸는 무한한 은혜를 암시적으로 나타냅니다. 결국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증표인 십자가의 신비를 묵시적으로 강조하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6~16절에서 의인이 겪는 극단적 단절의 고통을 묘사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가 몹시 고통스러움을 고백합니다. 이처럼 의인이 겪는 고통은 하나님 사랑의 극치인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겪으셨던 절대 절망의 고통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전반부에서 암시했던 하나님의 은혜 배후에는 절망적인 고통을 통한 하나임의 사랑이 있음을 후반부에서 암시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문제 제기는 우리에게 죄지은 우리의 형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명백한 대답을 줍니다. 초월적인 사랑으로 우리에게 죄지은 형제를 용서하는 실천적 삶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마땅히 취할 태도인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사이에 재난을 당하는 자가 많이 생겨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런 자를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자비처럼 깊은 섭리와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가 곁에 있다면 우리는 먼저 용기를 북돋워 주고 위로로써 상처를 싸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섣불리 그를 향하여 죄를 회개하라는 식의 경망한 충고는 삼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이지 절대로 정죄가 아닌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대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도와야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욥의 한탄처럼 불굴의 신앙에 덮친 고통이 주어지더라도 신앙으로 투쟁하며 승리하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