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욥기 18:1~21)②[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

꽈벼기 2023. 11. 23. 16:35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

(욥기 18:1~21)

 

1~4절 욥의 변론에 대한 책망과 비난으로 일관하는 빌닷의 책망을 내용별로 보면, 빌닷은 욥이 말을 길게 하는 자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빌닷은 욥의 장황했던 변론을 꼬집어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빌닷은 자신을 비롯한 친구들이 촉구했던 회개에는 관심이 없고 도리어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고 자신은 결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욥의 태도를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빌닷이 본문에서 의도하는 것은 욥의 긴 답변을 구차한 변명이라고 일축함과 동시에 계속해서 욥을 죄인으로 단정하여 악인들이 받을 재난과 욥의 상황을 일치시키려고 합니다.

 

빌닷은 욥이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욥이 친구들의 간곡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음을 비난하는 표현입니다. 빌닷은 본문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욥을 미련한 자로 보고 있는데 이는 빌닷 자신이 갖고 있는 인과응보의 법칙으로만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주의를 고수하려는 빌닷의 고집과 배타적 성격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빌닷은 욥을 거만한 멸시자라 합니다. 사실 욥은 소발에게 변론하던 중 짐승에게 물어 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친구들을 멸시해서 한 말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는 다만 짐승들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여 생명을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닷은 욥이 자기들을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본다고 생각하여 분노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빌닷의 말은 자신이 분별력과 온유함이 결여된 자임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주는 표현으로 이해가 됩니다.

 

빌닷은 욥이 자신의 분노로 고통당하고 있다고 꾸짖습니다. 빌닷의 이러한 꾸짖음은 욥이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말함으로써 고난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데 연유합니다. 욥이 고통스러워함이 회개치 않고 계속 분노하는 욥 자신 때문이라고 본 빌닷의 비난 속에는 죄가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그것을 찢는다는 사상이 자리 잡고 있어서, 욥의 고난을 범죄의 결과로 보려는 강한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빌닷의 모습은 자신의 교리에만 집착해 그것을 고집하는 배타적 신앙인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성도들은 상대방의 말을 배척하기 보다는 주의 깊게 경청하여 그 진의를 파악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아집과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얽매인 자들은 쉽게 분을 내고 판단하길 즐겨하나 신실한 성도는 오히려 이해와 포용력을 가져야 합니다.

 

5~21절 여기에는 상징적인 표현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빌닷은 빛, 등불,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누리는 생명과 번영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악인의 빛과 그 장막의 등불이 꺼졌다는 본문의 표현들은 악인의 멸망과 물질적 쇠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집니다.

 

올무, 함정 등은 예상치 않은 때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위험이나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악인이 평안한 생활을 하는 것 같아도 갑자기 재난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결국 이 같은 본문의 상징적 표현들은 악인이 당할 멸망의 처절함을 강조하기 위한 저자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빌닷은 욥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빌닷은 욥이 당면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악인에게 발생하는 재난의 본보기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망의 장자라는 표현은 치명적이고 참혹한 질병을 뜻하는 의인법적 묘사인데 빌닷은 욥에게 닥친 끔찍한 질병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다라는 진술 역시 처참한 비극에 대한 묘사이며, 욥의 자녀들에게 닥친 재난을 악인이 당할 징벌과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서 결국은 욥이 불의한 자요, 악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닷은 자신의 두 번째 변론을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다라는 결론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인의 삶이 형통하고 번영한다고 할지라도 이는 영원한 것이 아니요 불꽃이나 등불과 같이 금세 꺼져 영원히 사라질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악인이 패망한다는 빌닷의 이론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심판주 되심에 근거한 것으로 장차 심판의 날에 각자의 행위대로 보응과 상벌을 받는 자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말만 앞세우고 남을 천대하는 일 그리고 자기를 학대하는 일은 천박한 삶입니다. 어려운 형편에 처해 보아야만 한 사람의 인간됨이 드러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어떤 곤경에 처하여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천한 자로 변신되기 쉽고 경우에 따라서는 추악한 자로 떨어지거나 인격 파탄자로 변모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악인들의 끝은 두려움에 쫓기고, 죽음의 왕에게 사로잡히고 완전히 버림을 당합니다.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때 무엇이 옳고 그르며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가 있는지 종잡을 수 없는 때가 많습니다. 온갖 권모술수와 죄악된 방법으로 경쟁자를 누르고 부귀를 획득하는 것이 오히려 똑똑하고 멋있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악인에게는 잠시 동안의 부귀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패망이 덮치고 말 것입니다.

 

스스로를 성찰하기 원합니다. 다른 사람을 존경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의 의견만을 고집한다면 모든 만남은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기 원하며 거친 말로써 상대를 곤란에 빠뜨리거나 아프게 하지 않았는지, 있으면 용서를 구하길 원하며 새롭게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