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요한복음 12:12~19)③
‘호산나’를 외치면서 예수를 열렬히 환영한 군중들의 함성은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메시아, 바로 그분이 오셨으므로 더는 지체 말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달라는 민족적인 간청 이상의 것은 아닙니다. 무리는 예언을 성취하신 예수를 단지 자신들이 기대한 ‘정치적’ ‘민족적’ 소망을 이뤄줄 메시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을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수천 년 전 조상 적부터 이어져 내려온 고질적 부분입니다. 아마도 이 순간 예수의 제자들조차도 죽음으로 향하시는 예수에 대한 관심보다는 무리와 같은 맥락의 선상에 서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군중의 관심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나귀를 타고 입성 하시는 모습은 이미 스가랴 9:9절에 예언 성취입니다. 여기서 나귀를 타셨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지닙니다. 구약성경에서 ‘나귀’라는 동물은 사사들이나 왕들이 평화의 일을 수행할 때 사용했던 평화의 도구였습니다.
또한, 예수를 환영하는 무리의 찬송인 시편 118:25~26절에서 빌린 내용입니다. 본문은 시편의 구절을 연속적으로 인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이 즉각적으로 실현되기를 기원하는 내용의 구절을 합쳐서 인용합니다.
군중이 들고 있는 종려나무 가지 역시 구약성경의 배경을 가진 요한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종려나무 가지는 초막절 때 사용한 것을 기원으로 볼 수 있고 절기만 되면 으레 준비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종려나무는 ‘승리의 표상’인 것 같습니다. 요한은 고난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속사의 승리’를 예시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입성하시는 예수의 관심은 군중들처럼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일생 사역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세상의 빛이요, 선한 목자이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 전 인류에 대한 구원에 전적 관심을 두셨습니다. 그 엄청난 사역을 이루기 위해 지금 이 순간부터 고난과 죽음을 향한 발을 떼야 하는, 인간적으로는 가장 부담스럽고 영적으로는 가장 긴장된 순간이 예수께 다가온 것입니다.
27절의 말씀으로 예수의 심정은 이를 잘 대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신 예수는 결국,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를 얻으실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광경은 영적 승리의 장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정해진 고난의 때가 왔으므로 예수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당당히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흩어져 버렸고 무리의 함성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느렸습니다. 또 성경의 예언이 자기들의 눈앞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앞에 놓인 어둠의 시간을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사는 악한 시대를 분별할 만큼 영적으로 깨어 있길 원합니다. 주님을 찬양할 때마다 어둠의 권세들이 물러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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