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꽈벼기 2019. 3. 28. 08:1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마태복음 21:23~32)

 

23~32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논쟁과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여기서는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잡아 없애려고 기회만 엿보던 대적자들의 간교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본 기사의 시간적 배경은 수난 주간 중 화요일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메시아로서 공공연하게 입성하신 후 유대교의 폐단에 대해 거침없이 책망을 가하자, 가뜩이나 예수님을 책잡을 기회만 잔뜩 노리고 있었던 유대 지도자들이 크게 분노하며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한 본격적 음모에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로 표현된 사람들은 당시 유대의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을 점유하였던 산헤드린 공회 의원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통해 베풀어진 아름다운 선행이나 그분의 심오한 교훈 등을 구체적으로 들어 논쟁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하는 데에 있었으며 예수님을 모함하여 없애버리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권세에 대한 물음 또한 예수님을 책잡기 위한 간교한 제일보였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예수님께서 스스로 왕과 메시아로서 공공연하게 자처하고 나서기를 바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은 그들이 빌라도에게 고소할 때 덮어씌우고자 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적들과의 논쟁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탁월한 신적 지혜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미덥지 않은 논쟁과 어리석은 변론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보이셨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대적들의 질문에 직접 대응하여 당신의 권세를 하늘로서 말미암았노라고 대답하시면, 대적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몰아붙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서 말미암았다고 하시면 대적들은 일개 랍비 정도의 신분으로서 감히 스스로 메시아인양 백성을 기만하였다고 예수님을 정죄하였을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저들의 이러한 간교한 의도를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오히려 역질문을 통해 대적들의 입을 막아버림으로써 미덥지 않은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셨습니다.

 

다음으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명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적들의 입을 봉하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논쟁의 주도권을 잡고서,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세례요한의 증거로써 밝혀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이미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혹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증거 된 바 있습니다.

 

대적들과 불필요한 변론을 피하신 예수님은 곧이어서 진리 선포자의 위치에서 두 아들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 의미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책임 추궁입니다. 이 비유에서 맏아들은 율법을 강조하면서도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거역한 유대교 지도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의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도 실제적 행동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표리부동한 자들이었으며 특권 의식에 젖어 겉모양과 형식을 번지러 하게 치장하되 선민으로서의 진정한 사명은 깡그리 잊어버린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구속역사를 진행해 가는 가운데 이스라엘을 택하여 그들에게 주신 여러 약속은 예수 안에서 성취될 것이었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종교적 허울만 뒤집어쓴 채 하나님의 섭리를 도리어 적극적으로 거역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죽이고자 기를 썼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 비유는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이야기합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천시당하고 냉대 받던 세리나 창기 등과 같은 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종교 생활로부터 소외당하였지만, 종교 지도자들처럼 의식과 자만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자비와 긍휼히 풍부하신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자들은 상한 심령으로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며 가슴을 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말보다 실천에 있습니다. 실천은 순종과 일치하지만, 대답만 하는 것은 불순종과 같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실천했는가를 반성해 보는 것도 필수적이지만 비록 그동안 불순종만 했더라도 지금 당장 돌이켜 뉘우치는 일이 급선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곧 실천하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지난 잘못이 크더라도 태도를 바꾸어 실천에 들어가면 지난날의 잘못까지도 보상을 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행동을 돌아보고 온전치 못한 부분을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항상 나 자신을 돌아보고 겸손히 회개하는 심령이 되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