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이방인 축출과 십일조 징수 강화]

꽈벼기 2019. 3. 17. 07:24

[이방인 축출과 십일조 징수 강화]

(느헤미야 13:1~14)

 

1~9, 이방인을 과감히 축출한 장면입니다. 이교도와의 단절을 엄히 명한 후 느헤미야 자신이 그 실제적 표상으로 한 이방인을 내쫓고 성전을 정화합니다. 이교도와의 교제를 단절할 것을 명하는 1~3, 암몬 출신 도비야를 성전에서 쫓아내고 성전의 기물을 제자리에 놓음으로써 그곳을 정화하는 모습을 그린 4~9절로 구성합니다.

 

그래서 본서 저자 느헤미야는 언약 갱신 및 재정착이 끝난 후 백성들에게 언약 내용의 구체적 실천이라는 일련의 정화 사역이 있었음을 밝힙니다. 이와 더불어 느헤미야는 그러한 정화 사역에 자신이 직접 선두에 서서 참여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이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문제에 대한 율법을 낭독한 사실 이후에 도비야를 축출한 사건을 언급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부각합니다.

 

암몬 사람 도비야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을 틈에 끼일 자격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루살렘 성벽 사업을 대단히 적극적으로 방해하던 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대제사장 엘리야십은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간 틈을 타서 도비야에게 성전의 방을 내주어 살게 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합주의적인 종교에 빠지게끔 공작을 했으며, 그는 성전의 한 방을 차지함으로써 그 방에 원래 보관되었던 성전 기명 등의 물품을 다른 곳에 사장했고, 이에 따라 성전 제사는 원활히 드려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이스라엘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여 느헤미야를 정치적으로 무력화하려는 공작을 꾸몄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느헤미야의 이방인 축출은 단호했습니다. 그는 도비야의 세간을 그가 차지하고 있었던 성전의 방에서 밖으로 모두 내던짐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방인에 대한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웃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슬프게 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냉정한 듯했지만, 느헤미야는 이방인의 누룩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 백성의 순수성을 지켜야만 하는 대의에 집착해야만 했습니다.

 

마귀의 세력은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려는 사악한 노력을 절대 중단치 아니하며, 도비야에 대한 느헤미야의 조치와 같이, 성도들은 사단에 대해 단호하고 엄격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10~14, 느헤미야가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꾸짖음으로써 백성들이 십일조를 온전히 바칠 수 있게끔 노력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예루살렘 성벽의 중건에 대한 감격과 기쁨이 채 가시기 전에 나타난 백성들의 타락상을 기록한 것으로 레위인의 분깃을 도적질한 당시의 상황에 관계됩니다. 레위인들의 분깃에 대해 새삼 강조해서 규정하게 된 동기를 언급한 10, 그에 대해 대처한 사실을 그린 11~13,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여호와께 기도한 내용이 14절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가시적으로 회복된 이스라엘의 영적 혹은 종교적인 제도 또한 온전히 회복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특별히 본문에는 오직 레위인에 관계된 사항만을 취급함으로써 저자 자신의 레위인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십일조 헌납 의무 불이행이 방치되어서 십일조로 생활을 유지했던 레위 사람들이 호구지책 마련을 위해 성전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생각했던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 문제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레위인이 없으면 하나님께 제사도 드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여타의 종교적인 행사도 불가피하게 진행되지 못합니다.

 

외형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성전과 성벽을 중수함으로 회복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내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계시지를 않아 영적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여호와의 종교의 순수성은 훼손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혼합주의화는 급속도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십일조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지 아니한 것은 말할 나위 없이 그들의 신앙 침체의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푸셨던 모든 은혜를 망각하고,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하시리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침륜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경제적 가치가 작아진다는 인본주의적 산술 계산을 함으로써 십일조 헌납 의무를 게을리 했습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헌금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기여한다는 사실과 지도자는 미래에 나타날 결과까지 책임지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맡은바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 등을 깨닫습니다.

 

성전의 정화는 부정한 것들을 버리고 정결하게 만든 다음, 거기다가 성물을 채워 넣는 것으로 완수될 수 있고, 그런 일은 영적인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성전 정화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느헤미야에게서 배울 점들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가장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에 그만큼 거룩하게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할 일은 많으나 이젠 힘이 없네요. 제거되어야 할 죄악의 요소도 많고요.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이 나에게 적격일 것 같습니다. 교회와 사회가 말씀으로 새롭게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