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재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8)
1~2절, 바울 사도는 성도가 신앙적 삶을 시작하면서 먼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헌신하는 일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헌신으로서만이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고 생의 목표를 바로 설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헌신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분별할 수 있는 만큼 성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찍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 온전한 헌신의 구체적 내용은 성도의 온전한 헌신을 권고하고 있는 1절 말씀은 성도가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으로 ‘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절과 더불어 ‘너희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하고 있는 6:13의 사상적 배경이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여기에서 ‘몸’은 단순한 의미에서의 육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하는 자의 인격과 육체적인 힘까지를 포괄합니다.
바울은 영혼과 구별된 육체만을 하나님께 봉헌할 것이 아니라 온전한 몸의 헌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특별히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며 ‘성령의 전’이기에 그 몸을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섬김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자신의 몸을 헌신하면서 수반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두 가지로 요약하면 순종과 회개의 생활이요, 성령의 지배를 따라 거룩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헌신은 기독교 윤리의 기초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거니와 일회적이 아니라 성도의 전 삶의 영역에 걸쳐서 끊임없이 일어나야 할 근본적 의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주를 위해 일생을 사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재물로 드려야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본문을 볼 때 1절은 전폭적이고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는 반면에 2절은 그러한 헌신의 유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헌신의 유지라는 사상은 ‘희생을 제단 뿔에 매어 둔다.’는 구약의 말씀에 예시된 바입니다. 즉 희생 재물은 한번 드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계속 제단에 묶여 있어야 했습니다.
한편, 헌신의 유지에 대한 역작용은 ‘이 세대’로부터 옵니다. 2절에 쓰인 ‘세대’란 말은 ‘세상’이란 말과 동의어입니다. 성도들은 사단을 자기 신으로 섬기는 이 악한 세대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또한, 구원받은 성도들은 오직 내세의 소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존재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성도들에게 거짓되고 무상한 이 세대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대의 행동 방식과 사유 방식은 성도의 헌신 생활을 흐트러뜨리기 위하여 교묘히 도전해 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그 사상이나 생활 양태나 가치 등에 있어서 영속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이 세상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목표를 확립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함과 동시에 ‘변화를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변화’라 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의 갱신이 시작될 뿐만 아니라 생의 모든 과정에서 계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께서 영적 결단을 통해 광야에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고 갈보리로 가는 길을 택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소생한 성도들 역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새롭게 함’이란 성도가 세상일만 생각하던 무신론적 시각에서 벗어나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분을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기독교적 인생관의 확립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인생관을 통해 속 사람이 영적으로 변화된 성도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참다운 행복은 이 세상의 생활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고 그 뜻에 따르는 생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성도가 계속 헌신된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첩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헌신은 심령의 변화를 수반하며, 이 변화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가능케 한다고 하겠습니다.
2~8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큰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이외에 여러 가지 봉사 활동을 해야 합니다. 이 봉사 활동은 성도들 상호 간의 믿음에 유익을 주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를 형성하면서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봉사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앙을 성장하게 하시며 더욱 귀한 은혜와 은사를 부여해 주십니다.
그러면 교회 내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성도의 자세의 기준을 바울은 ‘믿음의 분량’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분량’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것으로서 성도는 자기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알 때만 올바른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바로 인식하지 못할 경우에는 자신을 스스로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과소평가한다는 것은 교만이요 과소평가한다고 함은 비겁을 일컫습니다. 교만과 비겁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치명적인 독소요 걸림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양자는 성도 개인의 신앙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의 성장에도 암적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언급한 ’믿음의 분량‘이란 개념을 더 정확히 이해시키기 위하여 성도들의 관계성을 이야기합니다. 즉 성도들이 서로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위치의 중요성은 물론 다른 성도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바울은 성도들의 관계를 ’사람의 몸‘으로 비유한 예화는 바울 서신의 다른 부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사용한 ’몸의 비유‘에 나타나는 세 가지 원리와 그 원리가 어떻게 성도들의 관계에 적용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인간의 몸에는 복잡하고 다양한 지체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 지체들은 한 몸에 속합니다. 그리고 각 지체가 자기 고유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때 그 몸은 건강한 삶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몸의 통일성‘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성도는 교회의 지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그 받은 은혜와 은사가 다르다 하더라도 다 한 가지로 그리스도께 속하며 하나 된 교회에 속합니다. 즉 성도는 한 몸인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성도는 자기중심의 생활 자세를 지양하고 교회 전체의 유익과 덕을 위한다는 공동체적 선을 지향해야 할 당위성을 부여받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성도들 각자에게 선물로 주신 은사는 질적, 양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사람을 차별함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성도 각인의 믿음의 그릇에 따라 은사를 주시며 그 그릇에 가득하게 주십니다. 큰 그릇에는 큰 그릇의 용도에 따라, 작은 그릇의 역할을 할 수 없고 작은 그릇이 큰 그릇 대신으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질적, 양적인 차이를 지니는 성도들의 은사는 각기 고유한 역할과 기능이 있으므로 다 중요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의 종류는 매우 다양합니다. 본문 6~8절에는 일곱 가지 은사가 열거되어 있으나 고린도전서 12:1~14:40에는 더욱 상세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은사는 크게 예언하는 일, 가르치는 일, 섬기는 일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거기에는 우열과 고하가 없습니다. 어느 것이 높고 어느 것이 낮은 것이란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보편적인 사회 체계 및 구조와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 나라의 특성이라 하겠습니다.
몸의 지체들은 제각기 고유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 기능과 역할은 다른 지체들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즉 한 지체가 자신의 직능을 원활히 수행할 때 몸 전체의 기능이 정상적 상태를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지체가 병들어 제 기능을 행하지 못한다면 관련되는 다른 지체도 크든 작든 얼마간의 영향을 받게 되며 몸 전체는 비정상 상태로 치우치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는 자신이 받은 은사와 직능을 수행함으로써 다른 성도와 유기적 관계를 맺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의 다양한 은사와 직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은사가 무엇이든, 자신의 믿음의 분량이 어떠하든 모두가 한결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의 역할과 소임을 다할 때 성도들의 신앙 공동체는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은사와 은사를 수행하는 방법은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과신의 본질적 측면은 독선적이요, 회의적이며 무신론적입니다. 그 결과는 일찍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복한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여러 나라를 점령한 후 마음이 높아져서 교만하다가 하나님께서 치심으로 미치광이가 되었습니다. 헤롯은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울의 교훈 즉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행해야 함을 다시 한 번 새겨야 할 것입니다.
●나의 몸과 시간을 바쳐야 할 때 어떤 핑계로 그것을 회피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그 뜻을 따라 나의 몸을 헌신하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찾아 사랑하는 일에 게으른 자가 되지 않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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