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꽈벼기 2018. 1. 30. 08:22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사도행전 12:1~17)

 

1~11, 복음의 확장으로 기독교의 영역이 점차 확대되자 헤롯 왕은 무자비하게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이 헤롯왕은 아그립바 1세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유아를 살해했던 헤롯 대왕의 손자입니다. 그는 세례 요한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던 갈릴리 분봉왕의 헤롯 안티파스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헤롯왕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박해를 감행함으로써 민족주의적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은 베드로의 고넬료 회심 사건을 사후 인정했지만, 안디옥 교회에 비해 이방인 전도에 있어서 덜 적극적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박해는 복음 전도에 대한 그들의 보수성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사건인 동시에 스데반의 순교의 영향과 마찬가지로 더 먼 지역에 복음을 확장하는 결과를 가져온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박해는 야고보의 순교입니다. 순교는 박해 중 가장 큰 고난으로서, 세상에서는 파멸이지만, 하늘에서는 영광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앙의 선진들은 순교의 현장에서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에서조차 영광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죽어갈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의 다른 고난의 형태를 목격하면서도 우리가 그 유형의 기준점을 찾아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서 이 두 가지 양상의 수많은 고난의 사건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고난의 양상은 오직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 안에서만 결정됨을 알 수 있습니다.

 

12~17, 예루살렘 교회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를 처형하려는 풍전등화와 같은 때를 당하여서도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만 의탁하는 아름다운 선례를 보여줍니다. 표면적으로 바라볼 때 예루살렘 교회가 위기 상황에 대처한 방법인 기도는 현실을 외면한 무기력한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미련하게 보이는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처형 직전의 베드로가 구출되는 기적을 일으켰거니와 이것은 교회와 성도의 본질이 합일했던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이며, 동시에 헤롯왕에 대한 교회의 승리인 것입니다.

 

베드로의 구출 사건을 실제 상황으로 믿지 않았던 성도들의 충격에서 비롯됩니다. 베드로는 사형수로서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엄격한 감시 하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베드로가 구출되기를 바라는 목적에서라기보다는 다만 자기들의 지도자와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방법으로서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구출 사건이 실제 상황으로 전개되었을 때 그들은 반신반의하면서 사실을 즉시 수락하지 않는 믿음의 한계를 보였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간구한 대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어린아이인 로데의 믿음과는 대조적으로 지극히 피상적인 것입니다. 비록 이 사건으로 불의한 핍박자 헤롯왕의 박해에 직면하여 일심으로 하나님께 간구했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진의가 송두리째 번복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이 에피소드에는 신앙의 굳건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관념적인 믿음에 대한 일말의 경고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현대일수록 간절하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간절함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머리카락 잘린 무능한 삼손과 같이 전혀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어쩜 사실일지 모르겠습니다. 사단은 수천, 수만 명의 무기력한 그리스도인보다 간절한 기도의 능력으로 무장된 소자 한 사람을 더욱 두려워합니다.

 

어떤 어려움에 묶여 있더라도 이 어려움에서 풀려나기 위해서는 기도밖에 없음을 압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