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열왕기하 9:14~26)②(열왕기하 9:14~26)②[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꽈벼기 2024. 9. 19. 20:50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열왕기하 9:14~26)

 

예후는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했을 뿐만 아니라 그 명령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민첩하고 신속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회를 재빨리 포착하여 전심전력으로 일을 진행해 나갔습니다. 또한, 그는 요람이 이스르엘 성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는 동안 이 일을 수행해야겠다고 결심한 뒤 아무에게도 그곳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지 못하게 한 후 이스르엘 성으로 병거를 미친 듯이 몰아쳐 갔습니다.

 

예후가 병거를 타고 이스라엘로 달려갈 때에 파수꾼이 그를 확인하기 위해 마중 나왔다. 그러나 예후는 절대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 나갔다. 주의 일을 할 때는 반드시 난관이 있고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누가 그것을 끝까지 참고 견디며 계속하느냐에 따라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합의 아들로 북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요람은 그의 신하였던 예후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일찍이 아합의 죄로 인해 요람의 집안이 여로보암과 바아사의 집과 같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바로 그대로 요람이 예후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요람이 왕이었던 오므리 왕가는 북이스라엘 개국 이래 가장 강력했으나 반면에 가장 악하고 부패한 왕가였습니다. 이러한 왕가가 요람의 죽음으로 그 대가 끊겼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에는 아합과 이세벨의 우상숭배가 영향을 끼쳐 온통 죄로 가득했습니다. 도덕적 윤리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극심한 타락을 드러낸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요람을 심판하여 죽게 한 것입니다. 이 일은 죄가 만연된 현대에도 경종이 되고 있습니다.

 

예후가 이스라엘 왕 요람을 죽인 것은 단순한 반란이나 인과응보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특별히 억울하게 죽은 나붓의 피를 생각하시고 그가 죽은 곳에 요람의 시체를 던지시므로 심판의 표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그의 심판은 준엄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개인이나 무리의 행악을 보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과 악에 대한 보응을 하신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을 가르치다가 독배를 들고서 죽어 갔고,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정신을 일깨우다가 동족의 총탄에 쓰러져 갔습니다. 노예 해방자 링컨도 자기 국민의 총탄에 쓰러졌고 비폭력 지도자 루터 킹 목사도 비명의 총탄에 죽어 갔습니다. 만약 이런 불행한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이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합의 죄악이 우리에게 숨어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 사회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할 줄 압니다. 하나님이 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또 심판하신다는 것을 깨닫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