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꽈벼기 2019. 12. 18. 07:51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요한계시록 18:9~20)

 

9~19절은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애곡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바 땅의 임금들의 울고 애통하는 장면이 9, 10절에, 상인들의 울고 애통해하는 것은 11~17a, 배 타는 선장 및 선원들의 울고 애통해 하는 것이 17b~19절에 기록된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울고 애통하는 기사는 에스겔 27장의 내용이 배경이 된 것으로 사도 요한 당시 로마 제국의 상태를 지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각각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첫째 애가는 왕들이 부릅니다. 로마의 왕들은 로마 제국의 그늘에 왕권을 누렸고 또 로마의 권력을 방조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와 더불어 부와 사치를 나누었고 그 죄악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가 망할 때 첫 번째로 타격을 받은 자는 그들이었으며, 애가를 처음 부른 자들도 그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울고 애통하는 것과 슬픔은 회개의 눈물이 아니라 권력자로서 그들이 누리던 특권과 악한 질서가 망하는 것을 슬퍼하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악한 것입니다. 땅의 임금들의 애가가 처음 나온 것은 정치 지도자들의 불의와 부패가 국민의 삶에 미칠 엄청난 파급 효과와 영향력을 암시한 것으로, 그 지도자들이 받을 심판 또한 가혹하고 엄중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애가는 상인들이 불렀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사치한 생활을 지탱해 주기 위해 상품을 공급한 자들입니다. 왕들이 바벨론과 더불어 지상의 권력을 누린 자들이라면, 여기 상인들은 부를 누린 자들입니다. 본문 11, 12, 15절에 나타나는 상품은 이곳과 사도행전 21:3에만 보이는 낱말로 을 뜻합니다. 여기서 상품이 짐이라고 불린 이유는 이 물건들을 낙타나 배에 싣고 운반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2, 13절은 상인들이 바벨론으로 실어 나른 것으로 사치한 바벨론의 면모를 보여주며, 28품목, 7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특히 13절 마지막의 종들과 사람의 영혼에서 또는 육체를 의미합니다. 즉 노예는 자신의 몸과 영혼을 모두 주인에게 팔아 짐승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사도 요한 당시의 로마 문명은 노예 제도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상인들은 사람들의 몸과 영혼까지도 상품 취급하여 사고팔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상인들의 애가를 통해 이들이 부패한 바벨론의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필요한 상품을 팔아 부를 축적하던 상인들로서, 부패한 정치가들과 함께 부정과 불의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착취의 근원이자 온상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마땅히 심판을 받을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울고 애통 또한 이기적인 것으로 장사의 대상과 거래처를 잃은 슬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의 울고 애통해 하는 것이 나옵니다. 이 애가는 앞선 상인들의 애가의 연장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울고 애통함을 부른 자들은 그 상인들의 상품을 운반해 준 사람들입니다. 19절에 그들이 실어 왔던 값진 상품이 불타버리는 것과 치부할 수 있는 대상을 잃어버린 것을 애석해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사람이 행복의 근거를 물질의 소유에 두게 될 때보다 중요한 가치들, 즉 진리, 인간애, 친교, 상호 신뢰 등을 상실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본문의 울며 애통해하는 자들에게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은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입니다. 그 죄성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게 만들며, 타인을 비인간화시키고 수단화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슬픔의 이유는 자신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멸망 때문입니다. 이처럼 적그리스도의 영은 세상의 영이요, 그들의 슬픔은 전적으로 세속적인 슬픔이었습니다. 12, 13절에 그들이 추구하던 최고의 목적은 갑자기 사라지고 14절에 영원히 되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20절에는 구속 받은 성도들이 기뻐하고 찬양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의 충성되고 선한 삶과 악인들의 범죄는 반드시 그 보상을 받게 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본 절에 나오는 성도들의 기쁨은 첫째는, 악인들의 멸망이나 고통 자체를 기뻐한 것이 아니라, 악에 대한 정의의 승리와 하나님의 공의의 성취를 즐거워한 것이며, 둘째로는, 개인적인 증오나 악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심판에 대한 신뢰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판단은 비록 나 자신에게 불이익이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기쁨이요, 찬양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부와 권력과 허영을 기뻐하는 자들은 큰 성과 같이 어느 날엔가 그 모든 것을 빼앗길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울 것이니, 의인은 기뻐할 것입니다. 정의가 궁극적이고도 완전하게 대접을 받는 날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고 괴롭혔던 자들은 곧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감히 대적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쁨의 삶을 사시길 기원합니다.

 

나는 이 세상의 보좌가 덧없는 것임을 깨닫고 주님만을 즐거워하길 원합니다. 주님의 따뜻한 손이 나를 안위하시므로 세상이 나를 유혹하고 위협할지라도 내 영혼이 언제나 안위함을 느껴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