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꽈벼기 2019. 4. 17. 07:56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마태복음 27:11~26)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을 통해 살펴보면 그들이 예수님의 사형을 스스로 확정시킬 때에는 신성모독의 죄명을 붙였거나 빌라도 앞에서는 반란 기도 죄의 올가미를 뒤집어씌웠던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긍정으로 답하셨습니다. 대적자들은 로마 지배에 저항하려는 반란 세력의 괴수라고 하는 정치적 의미에서 그 말을 사용하였지만,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약속된 바로 그 왕이심을 시인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시다 는 사실은 본서 전체의 주된 강조점이기도 합니다.

 

그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정치적 왕국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이며 그는 무력이나 권모술수로서가 아니라 사랑과 공의로써 그 백성을 통치하실 평강의 왕이 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일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왕이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변론을 요구하는 빌라도의 요청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셨는데 이는 이사야 53:7절의 성취였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자기변호를 한다고 해서 빌라도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리도 없었고 더욱이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 물로서 기꺼이 고난을 겪고자 하신 예수님의 뜻이 변경 될 수도 없었음은 자명합니다.

 

한편 전후 문맥으로 보아 첫 번째 심문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 사실을 거의 확신한 듯합니다. 따라서 두 번째 심문은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하는 빌라도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어 단순한 심문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당시 로마법상으로 로마 제국의 행정관은 아직 정죄 되지 않은 죄인을 사면해 주거나 이미 정죄한 죄인을 용서해 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5절로 미루어 유대 땅에서는 유대의 큰 명절인 유월절에 대사면이 규칙적으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했습니다. 물론 빌라도는 예수님께 대해 특별한 호의를 가져서라기보다는 자기 나름의 정략적 계산 하에 그런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수많은 군중이 환호하였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섣불리 앞장섬으로써 당할지 모를 화를 자초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과 유대 지도자들 사이의 관계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으므로 갑자기 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을 자청해오는 유대 지도자들에 대해 빌라도는 모종의 계략이 숨어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볼 때도 예수님께 모반죄를 적용할 만한 구체적 물증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여러 상황을 고려한 가운데 빌라도는 군중들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바라바와 예수님 중 석방할 자를 양자택일하라고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군중들은 바라바를 요구했고 군중들의 인기에 영합하려 한 빌라도는 그 요구에 맥없이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재판 과정을 거쳐 십자가 처형에 넘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때 예수님을 위대한 메시아로 떠받들며 추종하던 무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목이 터지도록 촉구하는 장면은 변절하기 쉬운 인간 내면의 잔혹상을 드러내는 극단적 실례라 하겠습니다,

 

나는 나의 입장보다 진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길 원합니다. 내가 집착하고 있는 또 다른 것이 있는지 돌아보면서 주님을 소홀히 하는 것이 없는지 생각해 봅니다. 언제나 믿고 확신한 바를 그대로 행하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