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마태복음 19:13~22)②
13~15절은 가정에서는 물론이고 교회에서도 어린아이에게 각별한 관심이 기울여져야 함을 교훈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탁월하신 권능과 교훈을 익히 들어왔던 터라 자녀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해치기 위해 기세를 더 높여가는 긴장된 상황이었음에도,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향한 기대감과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그들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심신이 피로하실 거라는 판단에서 그들의 접근을 제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각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수를 통하여 그들에게 실제적인 축복을 시여(施與)하셨던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은 그들의 영혼과 인격에 무한한 애정을 보내시며 그들의 영, 육의 건강을 소원하셨을 것입니다.
16~22절은 영생의 조건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청년은 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 같으며 재물도 많고 거기다 종교적 의무감도 철저하여 율법 의식상의 요구들에 충실하던 자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처음 나아와 여쭌 그의 질문 속에는 상당한 자신감이 엿보입니다. 아마도 그는 주위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해 보고 종교적인 측면에서 상대적 우월감에 젖어 있었으며 예수님으로부터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식의 대답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청년의 이와 같은 심중을 꿰뚫고 계셨던 주님은 3~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직접 청년의 잘못된 생각을 책망하시기 전에 그의 물음에 내포된 오류를 드러냄으로써 스스로 그것을 깨닫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청년은 율법에 자신만만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생의 조건으로서 계명 준수를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다 지키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사실 그는 율법의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측면에 충실하였을 뿐 율법의 지향하는 바가 사랑이며 온전한 의미에서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율법이 인간의 전적 무능을 일깨워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도록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의 허점을 찌르고 강력한 도전을 주셨을 때 청년은 근심하여 돌아가고 만 것입니다. 결국 본문은 영생의 유일한 조건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과 순종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은 인류의 최대의 관심일 뿐만 아니라 최상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얼마든지 부자 청년의 경우처럼 자기기만에 빠질 수가 있고 자신을 살리는 진리보다 다른 무엇에 더 마음을 팔수도 있습니다. 사실상 그 청년의 불행했던 점은 영생을 믿음으로 취하기보다는 자신의 공로를 의지해서 스스로 구원받으려고 노력한 데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치 않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자기 재물을 더 사랑했던 점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도 동일한 잘못을 범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부자 청년처럼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영생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나 자신의 것에 너무 집착하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봅니다. 내게 포기하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봅니다. 내가 포기하기 힘든 것을 먼저 포기할 수 있도록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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