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로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꽈벼기 2019. 2. 1. 09:49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로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마태복음 9:1~13)

 

1~8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 기간 중에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중풍 병자를 지붕에서부터 달아 내리는 과정까지 상세히 묘사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이야기를 압축함으로 예수의 위대하신 치유권능에다 초점을 맞추는 것 같습니다.

 

모든 질병의 근본 원인은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질병과 사망 등의 온갖 저주가 초래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병고에 시달리는 것도 범죄의 직접적 결과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병에 걸린 자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겸허하게 회개하는 심령을 지녀야 합니다.

 

본문의 중풍 병자 역시 자신이 범한 죄의 직접적 결과로 병에 걸린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모든 질병을 범죄의 결과라고 단정 짓는 기계적인 표현은 삼가야 합니다. 욥이나 요한복음에 나오는 소경은 특별한 죄가 없이 병에 걸린 예입니다.

 

병이란 구체적인 범죄를 떠나 하나님의 뜻 가운데 허용될 수도 있고 스스로 건강관리를 소홀히 하여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를 질 때 우리의 모든 질병 또한 함께 지고 가셨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확실히 믿기만 하면 어떤 질병도 지금 즉시 나을 수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부활한 성도들이 살아갈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분명 질병도 애곡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그러한 기적적 치유의 은혜가 현재 임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렸을 따름입니다. 요컨대 병든 자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함과 아울러 치료하시는 여호와께 치유 은혜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중풍 환자는 특정한 범죄 때문에 병에 걸린 듯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았다고만 하지 않으시고 더 궁극적인 영혼의 병폐인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본 사건은 과연 예수님께서 사죄권이 있느냐 하는 신학적인 문제로 비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서기관들은 한 마디로 신성을 모독하다고 단정하였습니다.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일개 인간으로 여겼던 서기관들이 신성을 모독하다고 한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심판 주일 뿐만 아니라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죄에 대한 모든 저주를 대신 지신 구속 주이시므로 당연히 죄 사함을 선포하실 수 있었습니다.

 

9~13절은 마태가 불림을 받는 광경 및 그의 길에서 베풀어진 잔치 석상에서 발생한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세리등과 함께 어울리는 예수를 바리새인들은 부정한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렇듯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사물의 핵심을 헤아리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었기 때문에 진리의 실체를 드러내시는 예수의 말씀과 행실에 대해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나섰던 것입니다.

 

13절의 말씀은 호세아 6:6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종교 생활을 경계하는 말씀인데, 이러한 경계는 계속 나타납니다. 참된 경건과 예배의 정신을 망각한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각심을 드높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12, 13절에서는 죄와 병을 다시 연관시킴으로써 중풍 병자치유 기사와 자연스러운 맥락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당시 유대인 중 일반 민중들은 율법의 자잘한 조목들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었으나 소위 정통파로 자부하는 자들은 율법의 세세한 규례들까지 지키며 일반 민중들과의 구별 외식을 나름대로 지녔습니다. 특히 그들은 죄인들로 분류된 매춘부나 세리 등과는 어떤 교제도 하지 않음으로써 의식적으로 성결한 체하였습니다. 한편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소위 정통파를 주장하는 자들의 대표 격이었습니다.

 

이들은 죄인과 병자를 위로하고 격려하기보다는 비난하고 정죄하기에 급급했고 스스로 선행을 쌓고자 하되 진정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는 성결 유지라는 명목으로 손길을 끊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전염을 염려하여 왕진을 거부하는 의사와도 같습니다.

 

중풍 병자를 벌떡 일으키시는 것을 서기관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풍성한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이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더 무거운 짐이나 괴로운 의무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을 거쳐 우리에게까지 주어진 하늘의 거룩한 특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구를 용서하면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전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의 변화를 보면 4 복음서 중의 한 복음서를 기록하는 위대한 사도로 변화된 사건을 살피면 이전 모습은 세리로서 죄인이었고 부르심을 받고 즉시 순종했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과 용기였으며 그는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을 초청하여 사실을 알리고 입으로 시인하고 행동으로 나타내 보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금식 하지 않은 이유는 복음의 주체이신 신랑과 함께 있기 때문이었고 생베를 낡은 옷에 붙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베는 복음이고 낡은 옷은 유대교입니다. 구습의 교리에 마음이 얽매여서는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옛 구습은 철저히 배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 부대는 낡은 가죽 부대의 완성이지만 새롭고 자유스러운 복음과 낡은 율법주의와는 본질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나는 주님이 모든 문제의 근원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임을 분명히 깨닫고 그분께 나의 죄를 고백하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내가 죄인이었던 것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나의 오이코스들을 위해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