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꽈벼기 2017. 4. 18. 07:48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4~31)

 

평소 도마는 의심이 많은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할 때까지 질문 했습니다. 이 단락에서도 도마의 이런 성향이 확인됩니다. 그는 열 제자의 증거를 확실히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부인한 정도는 믿을 수 없다는 차원을 넘어서 믿지 않겠다는 의지의 차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원문상 이중 부정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도마의 의심은 이렇게 단호했을까 왜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가 열 제자에게 나타났을 때 없었는지 라는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분명 부활의 간접적인 증거와 마리아의 보고를 들었습니다. 도마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이들의 증거들을 가볍게 여기고 제자들의 대열에서 이탈한 것 같습니다.

 

예수의 도마에 대한 책망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행동은 분명 불신앙이 전제된 것입니다. 그는 부활의 여러 가지 증거들을 단순히 의심한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해 버렸던 것입니다. 25절에 나타난 그의 강한 부정은 그이 신념을 동반한 발언으로서, 이것은 예수 부활의 가능성조차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앞서 열 제자에게 나타나셨던 방식으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그이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예수의 손과 옆구리를 도마에게 확인케 하신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도마는 예수의 신성을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도마의 사건은 오고 오는 세대의 성도들에게 귀감이 됩니다. 비록 부활을 눈으로 묵도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믿음으로 예수의 부활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지 못한 고로 믿을 수 없다는 변명은 한마디로 불신앙의 소치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3031절에서 요한은 전기적인 차원에서 예수의 행적을 다루지 않았고 오직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그는 예수의 많은 표적 중 이 목적에 부합되는 것을 선별해서 구성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의 지상 사역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든 표적은 본서의 기록 목적에 부합되도록 동원되었거니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서 영생이 주어지는 까닭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 고백 즉 주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에 근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 있는 자의 대열에 들어서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말씀을 날마다 붙드는 삶뿐만 아니라 주님을 위해 고난도 견딤으로써 우리 자신이 복 있는 자임을 세상 사람들에게 입증시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복 있는 자의 신분을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복을 추구했으나 이제부터는 날마다 성도들에게 부어 주시는 주님의 신령한 복을 추구하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나 역시 확실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믿기를 더디 하지 않길 원합니다. 주님에 대한 지식이 내 속에서 자라나 충만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