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꽈벼기 2016. 9. 21. 07:51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

(시편 69:22~36)

 

하나님께 궁극적인 찬양을 드리기에 앞서 자신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대적들에 퍼붓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 뒤에는 시인이 하나님 편에서 정직히 행했기 때문에 자신을 대적하는 일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지적하여 이제 자신을 핍박하는 악한 일을 그만두라는 경고성의 권고 또한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가 이렇게 잔인한 저주를 퍼부을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할 수 있지만 사실 시인은 단순히 개인적인 원한에 사무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어지럽히는 악한 세력들에 대해 저주한 것이며 또한 장차 구세주를 대적할 악한 세력들을 예언적으로 저주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습니다.

 

특히 21절의 말씀은 저주의 대상 또한, 시인의 개인적인 원한 관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을 대적했던 원수들에게 미쳐야 할 예언적인 저주로 이해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앞선 시인의 개인적인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교회가 원수들로부터 당하는 고통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은 먼저 자신의 원수 곧, 주 하나님의 원수에게 일상적인 삶이 영위되지 못하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즉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며 삶의 곳곳에서 불행이 엄습해 올 것을 저주합니다. 더욱이 그들의 경제적 원천인 토지가 황폐돼서 지극히 궁핍한 삶을 살게 될 것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크고 무서운 저주는 생명책에서 지우는것입니다. 결국, 주를 대적하는 일은 곧 영원한 죽음과 심판을 의미하게 되는 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시인은 29절부터 시의 분위기를 감사와 찬양으로 전환합니다. 이전까지 어떤 의미에서 본 시가 암울한 분위기였다면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더욱 밝고 확신에 차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대적 곧 주의 대적이 멸망과 죽음으로 끝날 것을 확신하므로 현재도 여전히 고난 속에 있지만,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결심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타 백성으로 더불어 장차 원수를 멸하실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 그 부르짖음을 듣고 필요한 모든 것을 베푸시는 분이시며 고난 속에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시인의 이런 감정은 모든 만물에까지 극대화해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바로 그분을 찬양함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시인은 시의 마지막에서 시온과 유다가 장차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으로 글을 매듭짓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기쁨의 근원은 외적인 환경의 변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고난의 상황에서도 먼저 얻은 믿음으로써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근본적인 평안의 근거인 하나님을 신뢰할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당한 환난이나 장차 당하게 될 고난은 우리를 고민케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원적으로 우리를 흔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신뢰하면서 현재의 어려움 속에서도 시인처럼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하겠습니다.

 

반드시 찬양 드리게 될 내일이 있을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온유한 자, 곧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의인의 승리를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리며 찾는 자들은 낙담하지 말고 마음을 회복해서 믿음, 찬양, 감사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음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무너진 곳들 심령, 가정, 교회 등을 다시 세우실 것이며 우리 후손들이 거기 거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있는 고통과 소망은 무엇이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을 주께 맡겨 찬송 드릴 날이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