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로마서 8:18~30)②[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꽈벼기 2023. 6. 11. 14:10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로마서 8:18~30)

 

18~25, 본문에서 바울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와 더불어 만물까지도 새롭게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 통일되는 그날을 꿋꿋한 인내로써 기다릴 것을 가르칩니다.

 

후사들이 본받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은 후사들은 고난 속에서 장래의 보증자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장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성도의 견인입니다. 곡식은 흙, , 거름, 공기, 햇빛에 의해 자랄 뿐 아니라 고난에 의해 자랍니다. 때로는 햇빛까지도 고난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태양의 강한 열이 그 곡식을 태워 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통하여 곡식은 제 알곡 됨의 영광을 누릴 수 있듯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될 하나님의 후사들에게 있어서 현재의 고난은 마땅히 치러내야 할 통과 의례이며, 장차의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 단락의 첫 절인 18절은 앞 단락의 결론입니다. 그러면 왜 앞 단락의 결론이 본 단락의 서론으로 채택된 것은 바로 바울이 후사가 받아야 할, 그리고 후사가 참아내야 할 고난의 실황으로서 세 가지 탄식 즉 피조물(자연)의 탄식과 인간의 탄식과 성령의 탄식을 서술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18절은 표제의 역할을 하고 19~22절은 객관적 교훈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피조 세계와 관계시킵니다.

 

특히 이 부분은 묵시 문학적 문장으로서 맘 졸이며 기다림’, ‘목을 빼 들고 내다 봄등으로 생명이나 혼이 있는 코스모스 전체가 타락의 늪에서 신음하며 창조의 갱신과 구속을 기다린다는 인격화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을 인간과 함께 공동 운명에 엮어 굴복하게 하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이 짧은 단락 속에는 묵시 문학적 표현법에 의한 허무, 탄식, 희망, 기대 등의 개념이 명백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바울이 본 단락에서 앞으로 9-11장에서 다루어질 내용에 대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의 전통적 모티브인 현재의 고통과 장래의 영광, 고통과 첫 열매, 희망 등의 단어와 표현들을 신중하게 거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8절 이하에서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는 것과 함께 자연계의 회복에 대한 기대를 서술했는데, 이는 인간의 타락으로 함께 저주를 받은 자연계가 메시아의 도래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리라는 구약이나 묵시 문학적 기대와 긴밀한 연관을 가집니다.

 

세상은 인류와 더불어 구원받으며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모든 생물의 생명을 존중함으로써 비롯된다는 이 사상은 바울의 비 헬라적, 비 신화적 특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바울이 영의 부활뿐 아니라 몸의 부활까지도 언급하고 있는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본문의 뒷부분에는 성령께서 이렇게 절실한 소원을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도 심어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 신자는 주 예수를 믿고 받아들인 그때부터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는 이미 이 지상에 속한 자가 아니며 하늘에 속한 자라는 자각을 가져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결과 마음속에 만족과 기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영적인 자유를 방해하는 육체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것은 조롱 속에 갇힌 종달새가 넓은 하늘에서의 자유를 고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성도들에게 그 불만을 참고도 남을 만큼 소망을 주시고 그 소망을 향해 인내할 힘도 주십니다.

 

26~30, 26절을 보면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요한복음 14:16에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의 도움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연약한 우리 인생을 도와서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가게하고 굳세고 강하게 합니다.

 

성도의 기도를 돕는 성령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미래를 내다볼 수 없기 때문이며,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우리에게 유리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며, 미련하여 무엇이 참 행복이며 축복인지 진단하지 못하고, 정욕으로 잘못된 기도를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성령입니다. 성령은 직접 우리의 연약함을 돕고, 우리의 기도를 도우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서로 관련되어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우리들을 위해 움직이도록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존재인 인간들은 우리들끼리 남겨진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구원의 과정을 과거형 시제로 서술하였을 뿐 아니라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영화까지도 과거형으로 진술함으로써 확고부동한 구원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거하고 성령이 그를 위하여 탄식하면서 기도하고 또 모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선을 이루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이것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세상의 방법대로 세상의 일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일을 전심으로 추구하며 살 뿐입니다.

 

고난 가운데서 지금 이 고난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재림시의 영광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길 원합니다. 나는 이 사실을 믿고 고난 가운데서도 승리하길 원합니다. 영광스러운 그날을 바라며 현재의 고난을 이기게 하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 간구하시는 성령님께 감사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