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꽈벼기 2020. 1. 22. 17:21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창세기 16:1~16)⓶


1~6절 언약의 보유자인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들의 힘으로 성취하기 위해 하갈이라는 몸종을 이용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언약의 주체이시자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하여 한 인격체인 하갈을 생산의 도구로 이용하였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필요에 의하여 이웃을 이용하기도 하고 이용당하기도 합니다. 이 같은 행동에는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기가 예사이며 단지 효용성이라는 측면에서만 상대의 가치를 평가하려는 악한 생각이 내재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람의 기대와는 달리 그 가정에 긴장과 불화가 생겨났으며 아브람과 사래와 하갈 3인 모두 심각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인간의 얄팍한 지혜로 이뤄보고자 하는 것은 교만일 뿐 아니라, 이웃을 고통의 늪으로 인도하는 악행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이웃을 이용하는 편법보다는 그 필요의 궁극적인 해결자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간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은 항상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에 의해 실행되어야만 합니다.


7~16절 여호와는 구속사의 주역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주인이요,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을 통하여 모든 인류가 출생했으며 또한 그분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인종, 종교적 폐쇄성과 우월의식에 젖어 지나친 독선과 그릇된 신앙으로 수천 년을 생활해 왔습니다.


여기서 이러한 이스라엘의 독선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구속사의 한 지류를 형성했던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위로와 사랑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즉 임신으로 교만했던 하갈이 주인 사래의 학대에 못 이겨 가출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녀를 찾아오셔서 그녀와 그녀 아들의 장래를 책임져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하갈과 이스마엘이 하찮은 존재일지 몰라도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늘 기억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래와 아브람의 불신과 횡포, 하갈의 교만한 처신 등 인간적인 실수와 치부 그리고 뼈아픈 상황을 질타하시거나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그 모두를 은혜와 사랑으로 덮으시고 끝내는 하나님이 목적하신 대로 그 상황들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이처럼 오늘도 하나님에게는 버려진 역사, 잊힌 인격, 외면당한 공간이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두를 기억하시며 그들을 위해서 지금도 선히 통치하고 계십니다.


◆아브람의 실패는 어처구니가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불신앙의 결과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해지는 아브람도 이런 실수를 했는데 하물며 우리야 이런 종류의 실수를 얼마나 많이 범하겠습니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그럴듯한 구실을 하나님 앞에 내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불신앙적인 세상 풍속을 좇지 말아야 합니다. 불신앙의 결과는 언제나 환난입니다.

쓰러지고 지친 그러면서도 멸망의 길을 계속 가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길은 회개의 길이며, 발걸음을 돌려 주님께 향하는 길입니다. 참 자유가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은 자신의 길을 고집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란 한 마디 질문을 기억합시다.


●현실에 부딪힌 문제 등에서 하나님 뜻보다는 나 자신의 생각으로 하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그런 일로 인하여 가정에 문제가 일어나 남을 비방하는 일까지 생겨나기도 합니다. 평화의 도구가 되지 못한 채 말입니다. 여러 가지 깨어진 일로 인하여 이웃과 사이가 멀어지기도 한 일들을 생각하면 기도가 됩니다. 모든 이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신실하심이 위대하다는 것을 깨달아 알기를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