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로마서 7:1~13)
1~6절, 바울은 본 단락에서 결혼 관계를 비유로 들어 정죄와 심판의 근거였던 율법으로부터 해방되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진리를 서술하고 있으며 이러한 해방과 연합은 율법 아래서는 획득할 수 없었던 풍요로운 생명의 결실을 가져온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실제를 법률적 논의에다 근거를 두고 설명하고 있으며 두 가지 죽음과 두 번의 결혼을 통해 갖게 되는 결과들을 ‘전에는’, ‘이제는’의 양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혼 법을 예를 든 이유를 말하면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신 득의’(以信得義란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칭의)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신득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내용이다)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 그 진리의 전후 과정 그에 따른 성도의 삶을 가르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비유들을 주제와 수신자와 그들의 경험 수준과 범위를 적절히 고려하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결혼의 비유도 그러합니다.
바울이 결혼의 비유를 실례로 든 이유는 성도와 율법과의 때려야 땔 수없는 긴밀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특히 결혼의 비유에서 나타나는 아내를 ‘남편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는 바울이 이 단어를 통해 결혼의 법적 효력을 강하게 부각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남편이 죽는 경우이거나 자신이 죽는 경우뿐입니다.
본 서신의 수신자인 로마 교회 성도들은 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법률적 비유는 그들에게 쉽게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로마의 유산과 문화 중에서 손꼽는 것은 토목 건축술과 법률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의 가장 일상적인 수준의 비유를 들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이해시킵니다.
바울은 일반적으로 예수를 남편으로 표현하는 기독교의 교훈들을 염두에 두고 그 교훈들과의 조화를 위해서 결혼법의 비유를 택한 듯합니다. 이미 기독교의 복음을 점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새 남편으로서의 예수는 익숙한 개념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예로 든 결혼 법에 의하면, 남편에게 매여 남편의 지배를 받는 아내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은 남편이 죽는 경우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 행동은 한 인물과 더불어 만료된다.’ 즉 죽음은 모든 계약을 말소시킨다는 이 법적 원리를 두 가지 경우로 이야기합니다. 한편으로는,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해방과 자유 함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가 옛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해방과 자유 함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가 옛 남편인 율법에 대하여 죽고 새 남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두 경우는 모두 완벽하게 율법을 만족시키고 결혼 법에 의한 의무로부터도 해방된 경우입니다.
이제 옛 결혼은 파기되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를 저주하고 정죄하는 율법의 능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의 증언대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거하는 죄를 건드리며 삿대질하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습니다. 법률의 의무도 끝났고 율법의 저주와 능력은 말소되었습니다.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만 그에게 매이는 것입니다.
이제 성도는 새 남편 그리스도와 새 결혼을 했습니다. 새 주인에게 인계된 노예는 새 주인의 계명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새 남편과 결혼한 아내는 새 남편에게 복종할 뿐만 아니라 그와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결과는 풍성한 열매 맺음입니다. 새 남편과 아내가 연합한 소산입니다. 다음으로 자신의 행동을 마땅히 바꿔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의문의 묵은 것이 아니라 새 영으로, 새로운 삶의 규범과 원칙 속에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본 단락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로부터의 자유요, 영의 새로움으로 섬기기 위한 자유입니다. 또한, 불순종하는 자를 정죄하는 율법의 선언으로부터의 자유요, 새 남편인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축복을 누릴 자유입니다.
7~13절, “성도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혹은 벗어났다”라는 교훈은 “그러면 혹시 율법 자체가 나쁜 것인가?” 하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 그 자체는 악이 아니며 다만 기능상으로 선과 악의 분별 기준이 되어 죄를 규정하고 폭로하고 심화시키는 작용하는 것을 설명합니다. 즉 악하면 그 죄가 악한 것이지 그것을 규정한 율법이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은 악을 악으로 보여주는 선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성도는 주님의 은혜로 이 율법의 적용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 율법과의 관계에 있어서 죽은 것뿐입니다.
죄에 대한 의인화 표현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율법과 죄의 관계가 죄에 대한 의인화 표현을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죄가 기회를 탄다, 죄가 나를 속인다, 죄가 살아난다, 죄가 내 속에 거한다, 등의 표현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에덴동산 이야기에 나오는 뱀 이야기의 잔재라고 설명합니다. 죄에 대한 이런 표현은 죄를 우리의 삶 가까이에 존재하는 인격적 악의 세력으로 느끼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죄를 실재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실존과 구원에 대해서도 무디기 쉬운데 이러한 바울의 죄에 대한 의인화 표현은 우리가 죄의 추상성을 극복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바울이 열 번째 계명을 예로 든 것은 그 순서 때문이 아니라 그 계명들과는 달리 인간의 더욱 근본적인 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탐심입니다. 바울은 율법이 죄를 거울처럼 비추어 줄 때 죄의식을 느끼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가장 깊이 숨겨진 인간 내면의 근본적 죄인 마지막 계명 ‘탐심’을 예로 들었습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계명들은 사람들을 유혹하여 계명을 완성하면 생명을 얻으리라 생각하도록 부추기도 합니다. 이처럼 율법은 성취의 의미에서의 순종, 즉 성취를 목적으로 한 순종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성취 자로 보고 자신에게만 의존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육체에 의존하려는 것이라고 봅니다. 바로 그런 자세가 죄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율법에 대한 봉사는 죄에 대한 봉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혹 율법을 그릇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율법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율법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경시하는 사람들도 율법이 인간에게 어떻게 적극적으로 역사하는지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 바르게 아시기를 바랍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제청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인간이 보다 하나님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신앙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몽학선생인 것입니다.
●나의 신앙생활은 은혜에 감사하는 사랑의 표현으로 행해지길 원합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의에 이르려고 하지 않고 주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길 원합니다.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즐거움으로 믿음을 지키게 하시고 주님께서 나의 죄를 알려 주실 때 아멘으로 받아 즉시 회개하는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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