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걸음마다
씽씽 신바람 일고
휘파람 소리, 그 휘파람 소리
가슴 울렁거리던
천둥 번개의 사나이들
어디로 갔나
가을 빈 들판은
패망의 왕국
목발에 의지한
허수아비 하나
마지막 노병으로
지켜서 있다
---허영자---
첫 서리가 오는 즈음에는 들판에 가서 한참 둘러볼 일이다. 그만한 성지가 따로 없다. 조금씩 식어가는 태양의 온도, 펄럭이는 바람, 싱싱한 빛을 등에 지고 어깨동무하여 모자리로 들어가던 물길은 다 말랐다. 개구리, 뱀, 메뚜기, 뜸부기, 등속의 흥성하던 뭇 생명들은 또 다 어디로 깃들여 갔단 말인가. 뭇 처녀들의 가슴을 흔들던 푸른 이마의 청춘들, 단단한 팔뚝과 ‘꽝꽝한 이빨’ 의 웃음들은 다 어디로 가고 무너진 논두렁, 말라 비틀린 물꼬만이 백골처럼 누웠다. 들판이 그러하듯이 인생이 그러한 것이다. 오월 난초와 유월 목단, 팔월보름, 시월단풍을 다 접고 일어날 시간, 무서리의 가을이다.
‘휘파람’ 불던 ‘천둥 번개의 사나이들/어디로 갔나’...이 구절만으로 이 시는 천둥 번개의 사나이였는지. 나는, 다시, 천둥 번개의 사나이 하나를 데리고 휘파람 불며 등 뒤에 아름다운 들판을 남긴다.
---장석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