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지음 / 돌베개 펴냄 / 400쪽 / 1만 3,000원
어느 날 사위가 "아버님, 이 책 한번 읽어 보시죠"라고 권하기에 특별한 책인 줄 알고 무심코 집어 들었다. 제목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다. 책을 들고 저자를 보니 생소한 이름이었다. 별 의미 없이 그냥 읽기로 마음먹고 집으로 가져와 제목을 다시 음미했다. 감옥에서 겪었던 수기 정도로 생각하고 책장을 한 장 넘겨 저자의 약력을 쭉 읽었다. 보통 경력이 아니었다.

약력에 놀라운 경력이 적혀 있었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20년 20일을 옥살이했다고 적혀 있다. 왜 이분이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먼저 저자를 조사를 했다. 인터넷 검색창에 이름을 입력하고 엔터키를 눌렸다. 자세히 인물 소개가 있었다. 통혁당 사건을 또 찾았다. 사실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사건이었다. 좀 더 이 사건을 확실히 알기 위해 이쪽저쪽을 뒤졌다. 이 일로 지금까지 몰랐던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었고 이분의 과거를 알고 읽게 된 책이다. 옥중 서간문으로 20년간 감옥에서 쓴 글이다.

신영복 씨는 경남 밀양 사람이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출신이며 윗대부터 학문에 깊이가 있는 집안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육사에서 경제학을 강의할 정도의 대단한 학구파이며 실력자이었다. 그 당시 신영복 씨는 학생 대표로 아주 깊숙이 통혁당에 관여하고 있었다고 한다. 종북 좌익에 물들어 있었던 사람이지만 그의 책을 읽는 동안 그 맛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이 정도 알고 책을 읽으면 이분의 사상이 드러나리라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넘기면 넘길수록 옥문에 기댄 사상과는 달리 글은 너무 멀어져 있었다. 문체는 옻칠한 농의 표면처럼 미끄럽게 잘 윤택이 나 있었다. 그러나 쉽게 읽히다가도 군데군데 어려운 내용 모를 한자가 나타나 나의 지식을 가로막고 있었다. 국어사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단어들이 수시로 나타나 읽는 흐름을 끊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옥 생활에 적응해 나가는 모습은 가족들에게 보내는 엽서와 휴짓조각에 써진 글에서 잘 나타난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숨결로 몸을 데울 수 있는 기술은 이곳에서밖에 터득할 때가 없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자체도 처음엔 어려웠을 것이다. 나름대로 여건과 조건을 맞추어 하나하나 녹슬지 않도록 가꾸어 나가는 그의 내면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계수씨에게 보내는 글에서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판단되지 못하고 말초 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판단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329쪽)"라는 글 속에 여름 잠자리의 이유 있는 증오가 바로 옆에 붙어 자는 가까운 사람에게 있음을 상기시킨다. 거기에 빗대어 없이 사는 사람들의 거친 생활에 한 줄금 비가 내리면 뜨거움이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여름날의 희망이 요즈음 세상사임을 암시한다.

이 책 속에 표현되는 용어 속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고전 문구들이 즐비하다. 한시까지 직접 지어 옛글처럼 고전다운 멋을 더한다. 금방 읽을 듯한 책이라 생각하고 손에 들었는데 시간은 장거리 여행을 하고 있었다.

단지 가족들에게만 전하는 감옥 생활 속에서의 삶을 그림 그리듯 표현하는 글들이 어쩜 뼛속 깊이 박혀 있는 상처에서 진주를 토해내듯 문장이 빛을 낸다. 밤낮으로 걱정하는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형님, 형수, 동생, 계수, 그리고 누이들과 조카들이다. 특히 아버지와의 우편 대화는 조선 때의 정약용을 보는 듯했고 어머니에게는 아픈 가슴 그대로 드러내며 안기는 듯했다. 형님에게는 말문을 닫은 채 어쩌다 새어 나온 입김으로 다가가고 동생에게는 아픈 현실이 체념으로 받아들인 양 한 마디의 말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형수와 계수를 통해서 마음껏 표현한다. 특히 어머니의 병환을 걱정하며 쓰인 엽서의 내용은 옥죄이는 심정이었다.

때로는 길게 쓰고 여유가 없으면 짧게 쓴 소품들이 감목 20년을 대변한다. 어느 정도 선임이 되었을 때 많은 책을 접할 여유가 있어 틈틈이 책을 읽었고 붓글씨를 썼다. 그림도 그리고 운동도 하고 많은 노동일도 하였다. 찾아오는 가족들에게 필요한 책과 붓글씨에 필요한 것들을 부탁하며 미래를 위해 많은 것들을 습득할 양으로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옥중에서도 누구보다 성실하며 지식과 더불어 지혜가 있어 밑바닥 삶과 잘 조화를 이루어 나갔고 말로 말미암은 험악한 분위기도 잘 소화하며 배설물로 잘 녹아 내는 인품이었다.

그냥 시간만 보내는 것이 아니고 사색하며 나름대로 즐기며 그 속에서 견뎌야 하는 도를 익혀 마음껏 참을 누리며 살아온 것 같다. 하나의 생각이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사물을 보고 느낀 것을 조각하듯 마음에서 다듬어 남긴 좋은 생각은 인고에 견딘 글이 되어 나타났을 것이다. 바로 짧은 글의 주제 제목들이 내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느낌이다.

난 글을 잘 쓰지도 못하고 읽기도 서툴다. 그런데도 순간 글 속에 빠져든 한 마리 나비였을 지도 모른다. 많은 책을 읽었지만, 이 책처럼 유별스레 가슴에 와 닿는 문장 표현술은 없었다. 고전과 어우러진 글솜씨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을 것 같다. 담 넘어 날아든 나비를 보고 알에서부터 번데기를 거쳐 나비가 되기까지 그 과정의 표현은 무심하게 지날 수 없을 정도다.

현대 과학의 물리학에서부터 경제학 그리고 문학 고전에 이르기까지 자유자재로 드나들면서 사고의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하며 동양의 지혜로 철학의 근거를 찾는 학자로 변신해 있다. 필재도 겸한 재능이 다양한 분이다. <처음처럼>과 <나무야 나무야아>에 실린 그림과 글을 보고 20년이란 세월이 만든 것인지 아버지의 유전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런 분이 회복 못 할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의문이 내 속에 뽀글뽀글 달아오른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대단히 자유분방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청년이었기에 그랬을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실제의 자기보다 위대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뛰어들었는지 상당히 궁금하다.

그분은 지금 말이 없다. 하지만 관용 주의와 포스터모더니즘이 팽배해 있는 지금, 옳고 그름이 없는 시대에 다시 날뛰는 이념은 그 소리가 찹찹하다. 북을 찬양한 것도 한때이기 때문에 지금은 빨갱이라 하면 오히려 당하는 시대다. 남북이 나누어져 있는 이때에 무엇이 국익이 되는지 뒤섞여 싸우는 고함에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겠다.

여기서 헤어나기는 어지럽겠지만, 이때에 이런 분이 한마디 쏟는다면 20년이 200년의 속 태움을 제자리로 돌릴 수 있지 않겠나 싶다. 기계적 현대 물리학과 정신적 철학과 경제적 사고와 고전문학으로 세상을 탓하는 사람들에게 글을 남길 수는 없을까 하는 바람이 있다. 자신은 지금 돌아가는 시국을 보고 한시로 한 편을 읊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판이한 삶을 산 신영복 선생의 사색에 나도 함께 상상도 못 할 글의 아름다움 속에서 긴 시간 여행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