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위징아, ? 호모 루덴스 ?
- 공향유의 놀이
조 광 제(철학아카데미)
1. 하위징아의 놀이로서의 역사
인류의 역사 전체를 하나의 원리로서 꿰뚫는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예컨대 “신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섭리가 역사를 관통 규정한다.”라는 기독교 신학에 의거한 역사의 일의적·보편적인 해석이라든가, 또는 “역사는 자유의 현실적인 확대를 향해 나아간다.”라는 철학자 헤겔(G.W.F. Hegel, 1770〜1831)의 일의적·보편적인 역사철학적 이해라든가, 또는 “역사는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는 철학자이자 혁명가인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의 일의적·보편적인 이해가 가능할까요? 그러한 일의적·보편적인 역사 이해에는 분명 그러한 이해와 해석을 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맥락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고 그 나름의 입장이 작용하고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의적·보편적인 역사 이해 자체가 당대에 특유한 역사적인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단박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여기에는 일종의 역설이 끼어들어 있습니다. 일의적·보편적인 역사 이해 자체가 역사 전체를 염두에 두고 볼 때 단편적·상대적이라는 사실이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책 『호모 루덴스』(1938)를 쓴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 역시 일의적·보편적인 역사 이해를 제출합니다. “역사는 놀이의 역사, 특히 아곤적 성격을 띤 놀이의 역사이다.”라는 명제를 제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위징아 역시 이러한 역사관을 피력할 때, 당대의 역사적인 맥락을 바탕에 깔고 있고 또 그에 따른 그 나름의 입장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하위징아의 역사 이해가 대단히 신선하고 심지어 유독(惟獨)하다고 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이미 상당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위징아는 어떤 시대적 상황에서 이러한 역사 이해가 긴요하다고 절감했던 것일까요? 이 책을 출간할 당시 유럽은 파시즘, 특히 독일 히틀러의 나치 당원들에 의한 정치적인 선동 행위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습니다.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이 책의 거의 말미에 이르러 하위징아가 말하는 다음의 문장들을 통해 ‘놀이’를 역사의 중심 주제로 잡은 이유를 약간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그 전에 현대 사회 생활(특히 정치)의 놀이 요소를 언급하고자 한다.
[…] 현대의 사회생활은 점점 더 놀이와 비슷하여 놀이 요소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지배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유치한 놀이(Puerilism)”라고 명명하겠다. 지난 20〜30년 동안 전 세계에 만연한 유치함과 야만성이 결합된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 전에는 의젓한 어른들의 영역이었던 문명 생활의 상당 부분에서 청소년 같은 심리와 행동이 판을 치고 있는 듯하다. […] 이러한 버릇들 중 군거성(群居性)은 가장 강력하면서도 위험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아주 저급한 유치하고 그릇된 놀이를 가져온다. 소리를 지르거나 요란하게 인사를 하고 휘장을 달고 다니고 각종 정치적 복장을 구사한다. 행진하는 방식으로 걸어 다니고 우스꽝스러운 집단적 행위를 한다. 이와 아주 유사하지만 더 깊은 심리적 차원을 갖고 있는 행위로는 사소한 오락과 투박한 선정주의에 대한 갈망, 집단 대회, 집단 시위, 행진 등에 대한 열광을 들 수 있다.(385〜6쪽)
하위징아가 “유치한 놀이”라는 개념으로 당시 유럽 전체를 지배하듯 하면서 기승을 부리는 파시즘의 정치적인 어릿광대짓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 “유치한 놀이”를 통해 인류 전체가 어떻게 망가지고 있는가를 제대로 보이기 위해서는 이와 대립되는 “진정한 놀이”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지요.
2. 시장을 넘어선 문화에의 갈구
하위징아가 “호모 루덴스”라는 개념을 내세워 당시 여러 대학들의 초청을 받아 강의를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놀이와 문화의 일치”였습니다. 이는 그가 이 책의 「들어가는 글」에서 제시한 “『호모 루덴스』를 펴내는 목적은 놀이 개념을 문화의 개념과 통합시키려는 것이다.”(21쪽)라는 언명을 통해 정확하게 표명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로서도 우선 문화에 관심을 집중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문화에 대한 관심은 많은 경우 이른바 대중문화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중문화를 문화의 중심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대인들은 크게 서너 가지 사회 구조를 통해 삶을 영위합니다. 국가, 시장, 문화, 그리고 매체입니다. 만약 매체를 문화에 포함시키게 되면 세 가지 사회 구조가 될 것이고, 매체의 워낙 강력한 위력을 염두에 두고서 이를 일정하게 문화로부터 독립시켜 생각하면 네 가지 사회 구조가 될 것입니다.
칼 폴라니(Carl Polany, 1886〜1964)라는 경제역사학자가 있지요. 『거대한 전환』의 저자이지요. 이 책에서 폴라니는 시장이 사회로부터 독립되어 이른바 “자기조정시장”이 되는 데서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시작된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자본주의적인 시장을 “악마의 맷돌”로 비유합니다. 그 맷돌은 결코 상품화해서는 안 되는 세 가지, 즉 인간(노동), 자연(토지), 사회규약(화폐)을 사정없이 갈아 상품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각종 무시무시한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오늘날의 세계 자본주의는 폴라니가 본 세계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힘을 발휘합니다. 심지어 국가마저도 일정하게 상품 시장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 아닌가 할 정도입니다. 예사로 빈발하는 국가들 간의 전쟁과 국가 내의 쿠데타와 시민혁명의 배후에 세계자본의 잇속을 둘러싼 암투가 작동하고 있지요. 그런가 하면, 2008년 미국 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조정력을 동원하여 결국에는 기존의 세계적인 금융자본을 유지 강화하는 쪽으로 작동하고 있지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저자인 저 유명한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경제와 사회, 공동체들』에서 “시장은 자체의 고유한 법칙성에 내맡겨져 있는 곳에서는 오직 사물의 명색만을 알 뿐이지 사람의 명색도 알지 못하고, 우애의 의무와 공경의 의무도 알지 못하며, 사적인 공동체들에 의해 유지되는 원초적인 인간적 관계들도 알지 못한다.”(318쪽)라고 말합니다. 시장에서 인륜적인 조그마한 실마리라도 찾으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때 시장은 당연히 자본주의 시장입니다.
비인간적이기 이를 데 없는 “악마의 맷돌”이 현대인들의 삶을 목 조르고 있는 셈입니다. 그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손아귀를 풀어내어 시장 정신으로부터 인간을 구해낼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을 가진 것은 국가밖에 없습니다. 국가는 법을 통해 현존합니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근본이 된다고 해서 제1조로 내세운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에는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119조 ②항에는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근본적인 소임이자 책무임을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시장의 지배에 휘둘리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국가의 존재 이유가 오로지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을 외면한 채 오로지 다국적(또는 초국적) 세계 시장을 바탕으로 한 재벌 대기업 중심의 경제 성장을 위해 정책을 입안하고 각종 법률 등을 통한 제도적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이른바 ‘시장세력’의 손에 국가의 정치적인 역량을 맡기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국가는 인간인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인 기업을 위한 것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시장세력’에 맞서서 국가를 인간을 위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와 적극적으로 대립되는 세력, 즉 ‘문화세력’을 형성해야 합니다. 국가를 가운데 두고서 시장과 문화가 격돌하고 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모여서 고전명저에 관한 강의를 듣고 각자 나름으로 비판적인 사유를 통해 진정한 삶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문화 행동입니다. 이러한 모임을 통해 우리가 시장 세력을 막아낼 수 있는 문화 세력의 ‘첨병’들임을 서로를 통해 확인합니다.
문화에 대한 관심을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되돌려야 한다는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일정하게 정당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일찍이 독일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일원들이 “문화산업”이라는 개념을 내세워 문화가 시장에 함입되어 전락하는 것을 비판해 마지않았지요. 오늘날 대중문화는 더욱더 시장의 위력에 휩쓸려 결코 ‘시장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화 이론에 있어서 고전적인 인물로 거론되는 레이몬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s, 1921〜1988)는 『문화와 사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문화의 개념은 그것이 오직 산업주의에 대한 대응에 그친다면 단순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새로운 정치 사회적 발전, 민주주의에 대한 대응이었던 것이다. 또 그것은 이와 연관해서 새로운 사회계급 문제에 대한 복합적이고 본질적인 대응이기도 했다. […] 문화는 한때 정신적 상태 혹은 습성, 혹은 지적·정신적 활동의 총체를 의미했던 비해 지금 그것은 전반적 생활양식을 의미하게 되었다.(17-8쪽)
공동의 문화 이념은 특정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연적 성장 이념과 그 육성 이념을 통합시켜 준다. 전자는 낭만적 개인주의의 전형이며, 후자는 전체주의적 훈련의 전형이다. 그러나 전체적 관점에서 볼 때 양쪽 모두 필수적으로 중요하다.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은 인간 평등의 인식을 위한 노력이며,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개성과 다양성을 인정해야만 비로소 현실적인 공동의 통치를 이룰 수 있다.(441-2쪽)
문화와 민주주의의 결합을 염두에 두고 있는 윌리엄즈의 생각을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그럴 때, 실제로 그러한 결합이 온전히 잘 이루어졌을 때 과연 어떤 삶의 방식이 가능할까요? 이를 상상하기 위한 좋은 실마리가 바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에서 발견된다고 여겨집니다.
3. 아곤을 본질로 하는 놀이
하위징아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그 실마리를 간결하게 요약해서 말하면, ‘아곤(agon)을 본질로 하는 놀이’가 되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 어는 놀이를 가리키는 서로 다른 세 단어를 갖고 있다.
첫째가 파이디아(phaidia)이다. 세 단어 중 가장 친숙한 것이다. 이 단어의 어원은 뚜렷한데 그 뜻은 “어린아이의 혹은 어린아이에 속하는”이다. […] 파이디아는 온갖 종류의 놀이를 가리키고, 심지어 플라톤이 『법률』에서 말했던 가장 고상하고 신성한 놀이도 가리킨다. […] 또 다른 단어 아두로(aduro), 아두르마(adurma)는 별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 어휘에는 사소하고, 무익한의 뜻이 들어가 있다.
놀이하기의 영역에 들어 있지만 파이디아나 아두르마로는 커버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 경기 혹은 경연의 영역이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데, 아곤(agon)이라는 단어에 의해 표현된다. 우리는 놀이 개념의 본질적 부분이 아곤의 영역에 숨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80〜81쪽)
‘아곤 즉 경기, 경연, 경합을 본질적인 특성으로 하는 놀이’라는 개념에서 우리 나름의 바람직한 삶에 대한 모델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우선 놀이에 대해 하위징아가 제시하는 중요한 규정들을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이는 ‘놀이의 일반적 특징’(41〜52쪽)이라는 소제목 하에 자세하게 논의되고 있는데, 그 핵심을 따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무엇보다도 모든 놀이는 자발적 행위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즉 놀이는 자유로운 행위이며 자유 그 자체이다.
(2) 놀이는 ‘일상적인’ 혹은 ‘실제’ 생활에서 벗어난 행위이다. 모든 놀이는 “〜인 체하기”이며 “오로지 재미를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놀이가 진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놀이는 ‘〜인 체하기’에서 ‘몰두에 의한 진지함’으로 나아가고, 진지함에서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높이’로 나아간다.
(3) 놀이는 무사무욕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놀이의 표현력은 모든 종류의 공동체적 이상을 충족시킨다. 그리하여 놀이는 양육, 번식, 종족 보존의 생물적 과정보다 더 우위에 있게 된다.
(4) 놀이터 내부에는 특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질서가 지배한다. 놀이는 먼저 질서를 창조하고 그 다음에는 스스로 하나이 질서가 된다. 놀이는 자체적으로 지고하고 절대적인 질서를 요구한다. 이 질서를 통해 놀이는 아름다워지려는 경향을 지니게 된다. 놀이에는 사물을 지각하는 가장 고상한 특질인 리듬과 하모니가 부여되어 있다.
(5) 놀이는 경쟁의 특성을 띠면서 더욱 치열해진다. 놀이 그 자체는 선과 악을 초월하지만, 놀이에 내재된 긴장의 요소는 놀이하는 사람의 심성 즉 용기, 지구력, 총명함, 정신력, 공정함 등을 시험하는 수단이 되므로 특정한 윤리적 가치를 부여한다.
(6) 놀이는 우리만의 놀이로서 남다름과 비밀성을 띤다. 놀이하는 우리만의 집단은 은밀함 속에 자신들을 감추면서 위장과 기타 수단을 동원하여 평범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강조한다.
하위징아의 놀이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규정은 자신이 선험적·직관적으로 떠올려서 정도한 것이 아니라, 역사학자로서 그 나름 최대한 관련된 실제와 담론들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놀이에 관한 이 일반적인 규정은 조금 더 뒤에서 이렇게 재 정돈됩니다.
놀이는 특정 시간과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자발적 행동 혹은 몰입 행위로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규칙을 따르되 그 규칙의 적용은 아주 엄격하며, 놀이 그 자체에 목적이 잊히고 ‘일상 생활’과는 다른 긴장, 즐거움, 의식(意識)을 수반한다.(78쪽)
중요한 것은 이 정도쯤 되면 놀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말하자면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요구하는 생존 중심의 동물 차원을 벗어나 문화예술적인 차원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만약 이러한 놀이의 여러 성격들을 전제한 상태에서 윌리엄즈가 말하는 민주주의에 값하는 문화를 떠올리게 되면, 그야말로 절대적인 평등을 바탕으로 한 자유, 그리고 역동적인 자유를 바탕으로 한 평등을 구가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야말로 펑퍼짐한 민주주의적 삶이 아니라 역동적인 민주주의의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위징아는 놀이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규정을 한 뒤,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등한 형태의 놀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고등 형태의 놀이에는 다음 두 가지의 기본적 양상이 있다. 첫째, 어떤 것을 얻기 위한 경쟁이고, 둘째, 어떤 것의 재현이다. 이 두 기능은 서로 합쳐져서 게임은 (1) 경쟁의 ‘재현’이고, (2) 어떤 것을 잘 재현하기 위한 경쟁이다.(52쪽)
여기에서 하위징아가 말한 “아곤을 본질로 하는 놀이”라는 개념을 비록 추상적이긴 하지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상당 정도 재확인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놀이가 과연 무엇을 재현하는가 하는 것이겠습니다.
우선 자연의 온갖 동식물들이 자아내는 리듬의 동작을 재현함으로써 상상력을 한껏 높입니다. 그리고 성스러운 의례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재현함으로써 그 장대하고 화려한 성스러운 세계에 참여합니다. 그럼으로써 무엇엔가 붙들려서 전율을 느끼고 황홀해 하는 것입니다. 하위징아는 이 모든 일들의 바탕에, 놀이란 일체의 자연에서 빚어지는 질서, 긴장, 운동, 변화, 엄숙, 리듬, 환희 등을 어떻게 경쟁적으로 더 잘 재현할 것인가가 작동하고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합니다. 의례와 극화(劇化)가 이루어지는 것은 그 바탕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후차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56〜59쪽 참조)
하위징아는 “무엇보다도 먼저 놀이가 있었고 의례는 그 다음에 왔다.”(59쪽)라든가 “놀이는 문화보다 앞선다.”(62쪽)라고 말합니다. 종교와 문화 그리고 문명의 모든 발전에 있어서 그 본질적인 바탕으로서 놀이가 관통한다는 점을 특별히 역설하는 셈입니다. 그런 와중에 아주 매력적인 다음의 말을 합니다.
놀이는 무의미함과 황홀감이라는 두 기둥 사이에서 움직이다.(65쪽)
이 말이 왜 그렇게 매력적인가요? 이 말에서 만약 인생이란 무의미하기 때문에 황홀하다는 주장을 읽어낸다면 어떻게 되나요? 또 이 말에서 만약 인생이란 황홀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읽어낸다면 어떻게 되나요? 그야말로 인생 전체를 놓고서 무지막지한 발언을 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그토록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고뇌하고 방황하고 미쳐 날뛰고 그 결과 온갖 종교와 학문과 예술의 내용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그 숱한 몸부림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함을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의미함을 황홀함으로 바꾸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게 합니다. 무의미함을 황홀함으로 바꾸어낼 수 있는 힘은 바로 절대적인 위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정도쯤 되면, “인생은 놀이이다.”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인생을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을 신적인 초월 이상의 초월의 경지로 올려놓을 정도로 인생을 찬양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최고도의 감각적 황홀인 ‘디오니소스적 도취’를 제시하고, 이를 정신의 발양에 견주어 정신이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나아가 최고도의 경지에 오른다고 하면서 어린아이를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라고 했을 때, 그 바퀴는 다름 아니라, 하위징아가 여기에서 말하는바, “무의미함과 황홀함을 두 기둥으로 삼아 그 사이를 오가는 놀이”, 그 놀이를 “놀이하는 인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인격적 타인욕망의 얼개로서의 문화
이렇게 놀이를 최고도로 멋지게 규정한 뒤, 그러니까 놀이야말로 인류 역사 전체를 처음서부터 인간을 동물뿐만 아니라 신조차 넘어서는 강력한 존재로 등극시키는 위력임을 강력하게 제시한 뒤, 하위징아는 결구 놀이의 본질로서 “아곤”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실제로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문화의 여러 양태들과 특성들을 논의해 나갑니다. 그 내용들을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책을 읽어봄으로써 얼마든지 하위징아가 얼마나 실감나게 구체적인 설명과 논증을 해 나가는가를 직접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아곤을 본질로 하는 놀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류의 문화의 정체를 드러내고자 하는 하위징아의 논의를 원용함으로써, 오늘날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적 삶의 체제가 빚어내는 온갖 반(反)문화적인, 따라 반(反)인간적인 부작용들을 간략하게 적발해 내고 이를 넘어서는 대안을 간략하게나마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결국 문제는 우리의 삶이니까요.
문화가 사회구조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문화는 본질상 순수 개인적인 것일 수 없습니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주어진 객관적이고 자연적인 사실들을 재료로 삼아 상호주관적이고 인간적(인격적)인 의미로 바꾸어내는 데서 성립합니다. 언어가 결코 사적·주관적일 수가 없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의미는 이미 늘 인간들 간의 소통 관계를 전제로 해서만 성립합니다. 문화를 과연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하는 난해하고 따라서 각양각색의 대답이 가능한 문제는 차치해 둡시다. 다만, 객관적이고 자연적인 사실들을 재료로 삼아 상호주관적으로 의미를 부여·향유·전달·축적·계승해 나가는 데서 문화가 성립한다는 식의 개괄적인 정의만을 일단 염두에 두기로 합시다.
이때 문제는 과연 의미의 근본적인 지향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무엇을 향한 의미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답하기가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만, 극히 형식적으로 보아 인간관계를 향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관계를 향한 것인가요? 문화의 근본 요소인 의미가 지향하는 인간관계가 과연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반드시 참고해야 할 책이 바로 하위징아의 이 책 『호모 루덴스』, 특히 거기에서 제시되고 있는 “아곤을 본질로 한 놀이”라는 개념인 것입니다.
하위징아는 그 대표적인 예로서 결국에는 시작(詩作) 경연을 제시합니다만, 이뿐만 아니라 올림픽 경기를 위시한 각종 스포츠와 게임들, 수수께끼 풀기, 재치있게 말하기, 노래와 춤의 경연, 포틀래치와 같은 증여를 둘러싼 경연(“포틀래치 관슴과 관련된 이런 기이한 행동들을 관통하는 원칙은 순수한 아곤의 ‘본능’이다.”<131쪽>), 사법적인 소송, 신부를 얻기 위한 경기, 전쟁 등도 모두 그 본질에 있어서 아곤적인 놀이에 해당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벗어나게 되면 야만적인 방식으로 퇴락하고 만다는 주장합니다. 저 앞에서 말한 파시즘적인 “유치한 놀이”가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입니다.
하위징아가 이에 관해 시대와 지역을 두루 관통하는 온갖 관련 예들을 검토하지만, 우리로서는 거기에서 작동하는 기본적인 사항들을 간취해 냄으로써 우리 나름의 독서 효과를 얻고
하위징아는 아곤적인 놀이에서의 경기(혹은 경연)는 어떤 구체적인 물적 대상을 두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승리 후에 얻게 되는 명예를 두고 다툰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와 관련된 하위징아의 몇 가지 언명을 연이어 보도록 합시다.
구경꾼은 놀이의 본질적 조건은 아니지만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만족감은 더욱 커진다. […] 모든 게임에서 경기자가 남들에게 자신의 성공을 자랑할 수 있는 상황이 매우 중요하다.(113쪽)
경쟁적 ‘본능’은 권력 욕망이나 지배 의지가 아니다.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은 욕망, 일등이 되어서 그로부터 명예를 얻는 것이다. 그런 성공으로 인해 개인 혹은 집단의 권력이 높아지는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겼다는 사실이다.(114쪽)
승리는 승리자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징’하고 또 실현한다. 즉 선량한 힘이 나쁜 힘을 누르고 이긴 것이며 동시에 그런 승리를 거둔 그룹의 구원을 의미한다. 승리는 구원을 표상(상징)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든다.(124쪽)
모든 고대 문화들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놀이, 그 놀이에서 본질적인 부분이 되는 아곤 즉 경기·경연·경쟁에 관한 중요한 언명들입니다. 이러한 하위징아의 언명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나름으로 ‘대상욕망’과 ‘타인욕망’이라는 두 개념을 구분해서 제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문화의 기본 요소로서 의미를 꼽았습니다. 그리고 의미는 소통 관계를 전제로 한다고 했습니다. 소통에는 타인과의 관계가 필수적인 조건으로 작동하지요. 타인과의 소통에서 필수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차이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경제에서의 교환관계를 살피는 것이 유력합니다.
경제 관계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물물교환이지요. 나에게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데(필요하긴 하지만 남아돌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된 것도 포함해서) 남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을 때, 그리고 상대방도 그러한 입장일 때, 그때 비로소 물물교환이 성립합니다. 이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안입니다. 말하자면,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 상대방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고, 그것이 나와 상대방 모두에게서 성립될 때 물물교환이 이루어집니다. 조금 어렵게 말하면, 나에게서 생기는 욕망과 대상 간의 어긋남을 타인의 욕망과 대상 간의 어긋남을 통해 메움으로써 나에게서 욕망과 대상 간의 합치를 이루는 것이 바로 물물교환입니다.
이는 “나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대상에 대한 욕망을 충족한다.”라는 명제로 일반화됩니다. 여기에서 논리를 한 단계 더 치고 들어가면, “나는 나의 대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타인과의 관계를 욕망한다.”라는 명제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을 대상(을 향한)욕망과 타인(을 향한)욕망으로 나누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욕망 발달에 관련하여 다음의 세 단계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내가 지금 당장은 타인을 통해 대상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지만 타인욕망을 충족함으로써 대상욕망의 충족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 타인욕망이 대상욕망에 종속되는 단계
(2) 나의 욕망이 대상욕망에 집중하는 단계에서 타인욕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 타인욕망이 대상욕망으로부터 해방되는 단계
(3) 나의 대상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타인욕망을 형성하는 단계에서 나의 타인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나의 대상욕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 대상욕망이 타인욕망에 종속되는 단계
이러한 욕망의 단계적인 발전은 오늘날에 이르러 강화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탄생에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할 정도로 너무나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인류가 이러한 발달 단계를 거쳐 왔다고 할지라도 마지막 단계인 (3)의 상태로만 욕망을 형성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 단계가 뒤섞여 혼재한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성(인격성)을 중심으로 해서 볼 때, 마지막 (3)의 단계에 이른 욕망의 형태야말로 진정한 인간적(인격적)인 형태의 욕망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된다 할 수 있습니다. 대상욕망에서 타인욕망으로 발달한 나머지 타인욕망이 대상욕망을 지배할 때,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타인의 욕망’에 대한 나의 욕망이 사회 전반적으로 발휘될 때, 그때 비로소 사회구조로서의 문화가 자리를 잡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입장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문화와 놀이, 놀이와 아곤에 관한 하위징아의 위 언명들입니다. 말하자면, 하위징아는 문화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대상욕망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타인욕망에 의거한 것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승리라는 성공을 자랑한다거나, 이를 통해 명예를 얻는다거나, 그 자체로 선량한 힘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여긴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대상욕망이 아니라 타인욕망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대중문화의 주축을 이루는 스타시스템에서도 여전히 일정하게 관철되고 있는 대목입니다. 타인들의 욕망을 나를 향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그럼으로써 타인들의 욕망 자체를 통해 충족되는 나의 욕망, 이 욕망이야말로 타인욕망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러한 타인욕망을 집단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아곤적인 경연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5. 공향유(共享有)의 타인욕망의 확장을 위하여
바로 앞에서 제시한 바 아곤적인 놀이의 여러 경우들, 그러니까 인류의 문화를 형성하는 온갖 경우들을 시시콜콜 논의한 뒤 결국 하위징아는 이렇게 정돈해서 말합니다.
일등이 되려는 욕망은 사회가 어떻게 기회를 제공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표현 형태를 취한다. 인간이 우월성을 놓고 경쟁하는 양태는 상품으로 내걸린 부상만큼이나 다양하다. 경쟁의 결과는 행운, 신체적 힘, 재주, 유혈적 전투 등에 의해 결판난다. 또는 용기와 지구력, 기량, 지식, 자랑하기, 머리 굴리기 등의 경쟁도 있을 수 있다. 힘에 의한 재판이나 특정한 기술 가령 칼을 만든다거나 교묘한 각운(脚韻)을 사용하는 기술 등이 요구될 수도 있다.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신탁, 내기, 소송, 맹세, 수수께끼 등이 형태를 취하는 경쟁도 있다. 어떤 형태로 진행되건 그것들은 놀이임에는 틀림없으며,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그 문화적 기능을 해석해야 한다.
모든 문화권의 아곤적 관습들은 상당한 유사성을 공유하는데, 이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인간 정신의 영역, 즉 지식과 지혜의 영역이다.(209쪽)
하위징아는 우리가 철학적으로 분석해서 그 원리적인 측면을 파악하고자 하는 사안에 대해 저 고대에서부터 실제로 있었던 많은 사례들을 증거 자료로 삼아 이른바 문화사적으로 풀이를 합니다. 그런 만큼 문화에 대해 다소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유도합니다. 이 인용문에서 새롭게 중요성을 띠면서 떠오르는 대목은 “인간 정신의 영역, 즉 지식과 지혜의 영역”이 문화의 아곤적 특성을 보편적으로 드러낸다고 하는 두 번째 단락입니다.
욕망이 다른 욕망들을 욕망한다고 할 때, 그 실현의 수단으로 안출·동원되는 매체가 다양하겠지만, 바탕이 되는 수단은 바로 지식과 지혜라는 것입니다. 온갖 아곤적인 관습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관통하는 핵이 지식과 지혜라는 것인데, 이는 문화를 대단히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그 정수는 이른바 모든 아곤의 경합에서 상대방을 물리치고서 가장 탁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상호주관적으로 인정된 지식과 지혜라고 결론내릴 수 있도록 합니다.
이를 너무 강조하면 자칫 엘리트주의에 빠질 수도 있겠으나, 엘리트주의가 지닌 배타적인 우월성 내지는 차별적인 배타성을 충분히 제거하고 본다면, 하위징아의 언명에 의거한 문화의 정수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그다지 배척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 장구한 세월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우리의 문화적인 상상력을 계속 자극하는 뛰어난 인문예술적인 업적들이야말로 문화의 정수이고, 이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그야말로 상호주관적인 이른바 ‘공향유’(共享有)에 의거한 타인욕망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지식과 지혜의 매체적인 바탕이 언어라는 사실입니다. 지식과 지혜의 아곤적인 탁월성은 바로 언어에 대한 아곤적인 탁월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는 하위징아가 결국 최종적으로 남은 탁월한 아곤적 놀이의 형태가 시라고 한 데서도 어느 정도 간취됩니다. 언어는 소통의 기본 수단이지요. 그런데 언어적 소통에서 출발점은 타인들의 관심을 끈다는 것입니다. 관심은 욕망이 분출되어 나오는 첫 번째 통로이지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그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식과 지혜가 뛰어난 것으로 평가될 것입니다.
언어적 소통에 있어서 관심의 유발에는 이미 늘 평가가 작동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공동의 관심이 집중되는 데서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경쟁은 평가로서 결론이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어적 소통을 통해 지식과 지혜의 경연이 이루어지는 세계는 분명히 문명적인 도구 내지는 기술의 세계와는 차원을 달리할 것입니다. 온 우주의 비밀을 둘러싸고서 일어나는 각종 의문들, 신성함에 바탕을 둔 경건함의 근원과 정의(定義), 선과 악의 구분, 정결함과 부정함, 사악한 세력을 물리치는 수단들, 언어 자체에서 비롯되는 논리와 비논리의 활용, 황홀과 열정의 길, 환희와 이완의 관계, 사랑과 증오의 분리와 결합, 의인화에 의한 상징과 알레고리의 활용 등이 언어적 소통의 경연장을 가득 채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언어적 소통의 활동들은 관심을 복잡다기하게 발전시키고 그에 따른 평가 역시 다종다양하게 발전시킬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우리로서는 문명이 아니라, 문명을 수단의 기반으로 삼는 문화라고 말하게 됩니다.
걸출한 사회철학자인 하버마스(Ürgen Habermas, 1929〜)는 그의 『의사소통행위이론: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 2권에서 “나는 의사소통 참여자들이 세계 안의 어떤 것에 대해 상호이해를 도모할 때 여러 해석을 조달하는 자원의 역할을 하는 비축지식을 문화(Kultur)라고 부른다.”(224쪽)라고 말합니다. 요약컨대 “문화는 상호이해 소통을 위한 지식이다.”라는 하버마스의 이러한 문화에 대한 정의는 하위징아가 말하는 “아곤적 관습의 지식과 지혜로서의 문화”와 상당 정도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버마스의 문화에 대한 간략한 정의에다 하위징아가 말하는 아곤적 요소를 결합해야만, 상당 정도 현실성을 감안한 문화 개념을 획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성을 감안한 문화 개념이란 욕망과 욕망 간의 현실적인 투쟁, 즉 다른 욕망들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한 여러 현실적인 상황들을 감안해서 문화적인 현상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가 『구별짓기』에서 최대한 실증적으로 보여준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차별적인 과시욕에 의거한 대중문화적인 경향이라든가 이를 둘러싼 자본주의적 상품화의 전략에 담긴 왜곡된 문화적인 경향, 심지어 전쟁과 같은 대대적인 비극에서 작동하는 문화적인 경향마저도 감안해서 문화에 접근할 때 현실성을 감안한 문화 개념을 획득하게 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왜곡된 문화적인 경향들에 대항해서 비판적인 역류를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데서 성립하는바 사회역사적인 아곤적 차원, 즉 사회역사적인 문화적 투쟁을 감안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사회역사적인 문화적 투쟁을 실천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돈하자면, 이렇습니다. 우선 문화는 투쟁의 장이라는 것입니다. 하위징아가 문화란 근본적으로 “아곤을 본질로 하는 놀이”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다고 한 것은 이러한 우리의 결론을 옹호해 줍니다. 다만, 그 투쟁은 근본적으로 의식주를 둘러싼 투쟁이 아니라, 타인들의 욕망들에 대한 욕망을 둘러싼 투쟁입니다.
그렇다면 문화를 일구어나가야 하는 목표로서의 방향도 어느 정도 감지해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의 욕망들 간의 투쟁이 서로의 욕망에 대한 욕망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더욱 풍부하고 더욱 강도 높게 일구어나가는 쪽으로 사회적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결국 모두가 모두의 욕망을 교차하고 공유하면서 향유함으로써 서로의 욕망의 폭과 깊이를 강화해 나갈 수 있는 영역들을 사회적으로 확대 심화해 나가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지금까지 개발된 그런 영역들은 다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헤겔이 인간 정신의 최고도의 결과물이라고 했고, 마르크스가 상부구조에 속한다고 말한 종교, 예술, 철학이 그 대표적인 영역들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인문예술적인 공향유의 영역이야말로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욕망하는 투쟁을 벌이면서도 오히려 그 투쟁을 통해 서로의 욕망 충족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영역들입니다.
그리고 이 근원적이면서 최종적인 문화의 영역을 대대적인 자본주의적인 비인간적(비인격적)인 기술문명으로부터 보호해 낼 수 있고 심화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정치적인 장치가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로써 맨 먼저 길들여야 하는 것은 법적·정치적 구조 영역인 국가의 공권력입니다. 시장을 향한 국가의 시선을 문화를 향한 시선으로 바꾸어내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시장을 문화적인 공향유의 삶을 위해 헌신하는 쪽으로 현실적으로 바꾸어낼 수 있는 위력을 지닌 것은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화적인 투쟁은 곧 정치적인 투쟁입니다. 문화적인 투쟁은 한편으로는 경제를 시장의 장악력으로부터 최대한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고, 그와 동시에 문화의 정수인 인문예술적인 위력을 최대한 강화해 나가는 투쟁입니다.
6. 하위징아에 대한 유감
마지막으로 덧붙일 것은 그런데 하위징아가 자본주의적인 시장의 핵심인 기업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유치한 놀이”로 보지 않고 그 나름 제법 긍정할 만한 놀이를 수행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상업과 테크놀로지의 승리 뒤에는 스포츠의 측면이 따라붙게 되었다. 최고의 매출액, 최고의 선적량(船積量), 가장 빠른 항해 속도, 가장 높은 비행 고도 등.
이렇게 하여 순수한 놀이 요소가 다시 한 번 실용적 고려 사항을 제압했다. 전문가들은 거대한 증기선이나 비행기가 아닌 작은 증기선이나 수송기를 사용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효율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거대 스포츠처럼 거대하게 조직되지 않은 놀이 본연의 특성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기업은 놀이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심도 깊게 진행되어 일부 대기업들은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놀이 정신을 주입시키고 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좀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놀이가 기업이 되었다.(378쪽)
이 하위징아의 언명을 어떻게 파악해야 할까요? 독자인 여러분들의 몫으로 남기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