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女眞)
문득 치어다본 하늘은
여진의 가을이다
구름들은 많아서 어디로들 흘러간다
하늘엔 가끔 말발굽 같은 것들도 보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여진의 살내음새 불어온다
가을처럼 수염이 삐죽 돋아난 사내들
가랑잎처럼 거리를 떠돌다
호롱불,
꽃잎처럼 피어나는 밤이 오면
속수무책
어느 여진의 창가에
밤새 쌓일 것이다
여진여진 쌓일 것이다
―박정대(1965~ )

가을에는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박정대 시인은 같은 제목의 시 '여진(女眞)'에서 '고요히 눈을 감으면 없던 너는 한 마리 촛불처럼 피어나고 있었다'라고 썼다. 가을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거기 누군가의 얼굴이 엷게 얼비칠지 모른다. 가을에는 사랑이 우리의
테라스 가까이에 와 있을지 모른다.
구름은 가을 하늘을 지나간다. 가을 하늘이라는 넓은 고원(高原)을 말발굽 소리를 내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흩어진다. 그처럼 사랑의 감정도 어딘가로 흘러간다. 마치 가랑잎이 바람에 이리저리 뒹굴다 어느 귀퉁이에 가 쪼그려 앉는 것처럼. 우리의 사랑도 가랑잎처럼 구르다, 말발굽처럼 내달리다 사랑하는 연인의 가슴에 가 쌓인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