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예레미야 42:1~14)②[너희가 이 땅에 눌러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

꽈벼기 2024. 7. 31. 23:50

[너희가 이 땅에 눌러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

(예레미야 42:1~14)

 

1~6, 여기에서는 전장에서 이스마엘의 반란을 지압한 요하난이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애굽으로 도주하려는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애굽으로 가려는 속셈을 알고 있는 예레미야는 신중한 반응을 보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합니다.

 

이처럼 유다 백성들의 배도하는 태도가 다시 한번 나타나는 본 단락은 유다에 남겨진 사람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퇴조하는 전환점이 됩니다. 이후로 선지자들은 바벨론에 사로잡혀간 백성들에게 주의를 집중하면서 새로운 구원을 대망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을 진압하고 백성들을 구출한 요하난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를 포함한 모든 군대 장관들과 온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유다에 남았어야 했음에도 애굽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길에 대해 축복을 받기 위해 예레미야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합니다. 물론 그들은 형식적으로는 자신들의 갈 바를 물어왔지만, 내심으로는 이미 애굽으로 가고자 하는 결심을 굳힌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의 안전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속셈을 알고 있는 예레미야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려는 동기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신 모든 것을 전해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했다 할지라도 실제로 애굽으로 가려고 하는 사실 자체가 벌써 하나님의 유다 심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음과 아울러 예레미야의 선지자로서의 진정성에 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결국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중보기도를 요구하였던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데 있었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재앙을 당하고서도 여전히 자신들의 사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유다 백성의 죄악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이런 자세를 통해서는 절대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7~14, 율법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거절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사상을 더욱 명확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애굽으로 가도 되느냐는 요하난과 그 일행들의 물음에 대해 예레미야는 그들이 유다 땅에 계속해서 거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애굽으로 갈 경우에는 멸망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러한 메시지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일관된 예레미야의 사상입니다. 유다에 거하면서 바벨론에 순복한다면 느부갓네살 왕은 땅을 되돌려주고 온갖 혜택을 베풀어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살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간다면, 자신의 맹세를 저버리는 대가로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잘못되고 실패하는 것을 바랍니까? 어린 자식이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 제멋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한 치 앞도 장담하기 힘든 우매한 인생,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수 있는 연약한 인생이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거역하는 것은 곧 자신의 존재 기반을 파괴하는 행위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매사에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항상 변화하는 주위의 상황을 생각합니다. 이런 일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