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사도행전 11:1~18)②[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꽈벼기 2024. 5. 25. 11:02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사도행전 11:1~18)

 

여기에는 아직도 복음을 유대교적 연장 선상에서 이해하는 유대계 기독교인들의 힐난(詰難)과 이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이 전개되어 있습니다. 고넬료의 회심 기사가 거듭 강조하여 기록된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의미가 여기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 단락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설득하는 입장에 있던 베드로 역시 상당 기간 동안 유대주의적 사고방식의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베드로는 이방인 형제들과 함께 식사하던 일을 두려워하다가 면박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로 불림을 받았던 바나바와 초대 교회의 정신적 기둥인 야고보까지도 유대주의적 편견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복음의 수납 과정에서 예수의 복음과 모세의 율법과의 형식적인 조화를 꾀하는 유대주의적 기독교를 추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은 비록 복음을 영접하더라도 모세가 명한대로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유대계 기독교인의 비 복음적 저장들은 초기 이방 선교를 집요하게 방해하는 암적 요소로 작용하였습니다. 본문에 제기되는 갈등도 이 유대주의적 기독교의 맥락에서 파악됩니다. 할례자인 베드로가 무할례자인 고넬료의 집에서 음식을 함께 나눈 사실이 문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기적들은 그 당시 몇몇 소수의 보수주의자의 의견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전반적 경향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교 기독교인들의 편협함과 보수적 성격은 하루아침에 변화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습성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위치에서 복음 사역을 감당할 뿐, 그들의 편협한 생각으로 원대한 선교의 계획이 좌절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의 회심 사건을 통해 그들에게 새로운 선교의 비전을 제시하셨고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으로써 베드로의 변론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하나님의 크신 경륜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직접, 간접적으로 개입하심으로 유대계 기독교인들의 갈등은 극복되고 복음에 대한 그들의 소극적 자세는 새로운 일꾼의 적극적 자세로 바뀌어 새로운 선교사의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민족적인 편견, 전통적인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힐난에 대해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 ‘사도의 권위운운하며 큰 소리로 이들을 꾸짖을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일어난 일을 차례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성질이 급했던 베드로의 변화된 모습이 도전됩니다.

 

내게 있는 편견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이루신 일들을 비판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내 생각과 맞지 않은 사람을 대할 때 주님의 온유하심을 배우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