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1~19)②[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마가복음 3:1~19)②
1~6절, 사건의 초점은 손 마른 자의 치유 자체 보다는 팽팽한 긴장과 대립 속에서 적대자들이 예수님의 탁월하신 말씀 앞에 마침내 입을 닫고 말았다는 사실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논쟁의 주도권을 잡고서 역질문을 가함으로써 대적들을 침묵시키셨는데, 이러한 역질문의 방법은 여러 차례 사용되었습니다.
질문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라는 것입니다.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안식일에 환자를 고치는 것을 노동 금지 규례에 대한 위반이라 생각하였으므로, 그르다는 것입니다. 안식일 엄수라는 명목으로 오히려 악을 자행하며 사람을 죽이려 하는 대적들의 자기모순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6절에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라는 말은 예수님과 대적자들 간의 모든 갈등에 대한 결론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헤롯당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데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7~12절, 예수님께서 점점 심해지는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해 잠시 갈릴리 호수의 어느 지점으로 피하십니다. 인간들이 두려워서 피하신 것이 아니라 일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음모에 대하여 아시고 죽을 때가 아니므로 일단은 한적한 곳으로 물러갔지만, 또 그곳에서 각 지역에서 소문을 듣고 온 무리를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을 대하실 때마다 예외 없이 타협이나 부드러운 청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꾸짖고 질책하시는 입장에서 그들을 상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비록 예수님에 의하여 고통을 당하는 원수인 귀신들에 의하여 고백 된 것이지만 그것은 예수님께 주어진 정확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 드러내야 할 때가 오지도 않았다고 귀신들이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귀신들의 외침을 저지하였던 것입니다.
13~19절, 열두 제자의 임명은 새 이스라엘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망각하고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이제 예수님 안에서 새로이 탄생할 영적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속 계획을 성취시켜나가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열두 제자들을 훈련해 예수님의 뒤를 이어 교회의 터를 견고하게 세울 일꾼으로 쓰기 위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교육하셨습니다. 특히 거세지는 핍박의 열기로 말미암아 제자들의 마음이 흔들릴 위험이 많아짐에 따라 집중 교육이 절실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시키기 위함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자들을 세웠었고 어떤 인간적인 자격이나 재능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교육 수준 혹은 성격 등을 살펴보면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어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재능이나 지식으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오직 주의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들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지혜와 권능으로써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의 문자적 해석에 얽매인 채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철저히 외면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선행을 위해, 생명을 구하시기 위해, 또 그들의 그릇된 신앙관을 바로잡아 주시기 위해, 안식일에도 일하셨습니다. 만약 이것이 예수님의 거룩한 뜻일진대 주일을 맞는 우리 신앙인들은 형식적이고 경직된 자세를 탈피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며, 이웃을 돌아보는 좀 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신앙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고 그 의미를 찾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행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매 순간 주님을 찾으며 주님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길 원합니다. 시간이 없다고 묵상 시간을 조급하게 사용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길 원하며 주님의 길을 따라 사는 법을 알아가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