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욥기 42:1~17)②[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꽈벼기 2023. 12. 20. 12:42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1~17)

 

1~6절 하나님을 향한 두 번째 응답입니다. 여기서 욥은 진정한 회개를 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긴 말씀을 통해 자신에게 닥친 고난이 하나님의 섭리하심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변론을 요청하고 중재자를 요구했던 일, 의로운 자신에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통치에 문제가 있음을 역설한 일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소치에서 나온 것이었는지를 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욥의 회개는 영광의 주를 뵙게 되자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 욥을 티끌과 재 위에 앉혔습니다.

 

7~9절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 엘리바스에게 욥을 향해서 지금까지 해온 친구들의 변론이 정당하지 않다는 판결을 내리십니다. 욥의 친구들은 어떤 형벌에는 분명히 죄라는 원인이 있다는 인과응보의 논리로 욥을 정죄했습니다. 엘리바스는 영적 현상에 관한 주관적 체험으로, 빌닷은 전통적인 견해로, 소발은 자기 나름의 확신으로 욥을 정죄하였습니다.

 

친구들의 이와 같은 논리는 개별적 의미에서 볼 때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으나 이 개별성을 보편화시킴으로써 하나님을 제한해 버리는 우를 범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 친구들의 이러한 남의 비위를 잘 맞추어 아첨함과 우매함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이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욥을 중재자로 하여 친구들에게 번제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욥과 친구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주목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이 사랑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접근해 오시는 하나님을 모셔드리고 그분과 화목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예수의 대속하신 은혜와 그 능력을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10~11절 하나님께서는 끊어졌던 일가친척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심으로 고난 직후 욥에게 내리신 축복을 가시적으로 드러냅니다. 그 중 10절은 이후로 전개될 축복 내용의 서론격인 문장으로 욥이 하나님께로부터 갑절의 축복을 받았음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런 갑절의 축복을 내리시는 가운데 먼저 단절 되었던 여러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사실 아내의 떠남은 욥에게 있어 인간적인 모든 관계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을 알던 모든 사람들의 위로를 통해 끊어졌던 관계를 회복시키셨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당시 가장 귀하게 생각하고 변하지 않는다고 확신한 금 장식물을 통해 욥과의 관계가 이제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12~17절 욥은 노년에 손자 4대를 보며 전국에서 가장 예쁜 딸을 소유할 만큼 복된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러운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욥이 하나님 앞에서 선했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했기 때문에 받은 복이라기보다는 욥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고난은 꼭 죄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욥기의 주장과 같은 원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함과 정직의 결과가 반드시 축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축복의 배후에는 더 심오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는 관점에서 욥의 고난과 욥의 축복을 바라볼 수 있다면 편협한 욥의 친구들의 논리는 극복되어질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는 극도의 불행 가운데서 죽기를 소망한 욥에게 장수의 복을 허락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성도로 부름 받은 인생의 모든 과정이 오직 그분의 주권 안에 존재할 수 밖에 없음이 명백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빛이며, 우리의 구원이며, 우리 생명의 능력이라는 성경의 증거가 진리임을 확신하고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의 씨앗도 땅에다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마침내 열매를 맺는 단계가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들 신앙의 단계에야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만히 보면 10, 20년 신앙생활을 했다는 사람도 여전히 듣는 데만 머물러 있어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만큼 온전하게 되리라는 더할 수 없이 높은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곳까지 반드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세 친구들의 입장과 욥의 처지를 견주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 친구들은 자기 신앙관을 가지고 욥을 정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이들을 크게 질타하셨습니다. 반면 욥은 세 친구들의 종죄까지 겹쳐 더욱 고통을 겪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옳은 점을 들어 보이셨습니다. 특히 욥이 세 친구들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고 기도했던 일은 신앙생활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유형의 신앙인들을 살펴보면서, 가능한 대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편을 선택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남 앞에서 겸손하게 내 자신을 내려놓길 원합니다. 사실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언제나 싫어도 기색이 없이 자신을 낮추어 관계를 설정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겸손한 마음으로 욥을 알아가길 원합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봄으로 나의 삶이 깊어지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