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4:31~35:16)②[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도다 하리라]
[욥이 무식하게 말하니 그의 말이 지혜롭지 못하도다 하리라]
(욥기 34:31~35:16)②
31~33절 욥이 변론했던 내용의 부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절대 의와 주권을 들어 올바른 사람은 고난을 받을 때 겸손히 자기를 되돌아보고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주시는 교훈을 순종하고 받아들인다고 강변합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욥이 고백했던 무죄와 순결함의 주장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대한 반역이요 죄인이 취하는 변명의 태도라고 단언하며 마침내는 이를 욥의 죄라고 반증하는 증거로 규정하고 맙니다.
34~37절 욥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자신의 판단에 지혜자들의 동의를 첨가하여 욥이 더욱더 시련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후는 이러한 정죄의 근거를 욥이 시련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악인이며,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하는 패역한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남을 정죄하는 엘리후의 태도는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거스른 강퍅하고 잔인한 처사임을 보여 줍니다.
★이 내용을 통해 어떠한 것이 옳고 그른지의 판단은 자신의 좁은 신앙과 알량한 신앙 지식으로 할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준을 두고 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 잘못을 범한 믿음의 형제가 있을 때 여론을 몰아 정죄하기보다는 사랑과 이해를 기초로 권면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지체된 성도의 본분입니다.
35:1~3절 여기서는 욥의 주장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엘리후가 본문에서 제기한 욥의 잘못은 먼저 욥이 하나님보다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단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라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또한 욥이 신앙의 무익함을 주장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독백전반에 흐르는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볼 때 이는 인생의 허무함과 악인이 번영하기도 하는 세상의 모순됨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나온 고뇌에 찬 외침이요 탄식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후가 제기한 욥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욥을 공박하기에 급급한 엘리후의 성급한 판단에서 비롯된 오해와 그에 대한 과대 해석임을 알 수 있습니다.
4~8절 엘리후의 반박적인 답변이 나옵니다. 엘리후는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선악간의 행위는 유한한 인간 세계에서만 통용될 뿐이지 무한하시고 초월적인 하나님께는 하등의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욥에게 신앙의 유, 무익을 따지는 본질적인 권리 자체가 없음을 강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초월적 신관에 의한 엘리후의 변론은 엘리바스가 22장에서 언급한 말과 뜻을 같이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엘리후와 엘리바스의 태도는 1차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우시다는 무한한 속성과 스스로 사랑하시며 자신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자기 충족적, 유복적 속성을 지니신 분이라는 관점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합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욥의 주장을 기본적으로 과대 해석하고 있으며 욥의 고뇌에 찬 탄식에 대해 동문서답 격의 답변을 했다는 점에서 볼 때 욥의 고난에 대한 실제적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극히 선하셔서 피조물에게 자선, 사랑, 은혜, 긍휼 등을 베푸시는 도덕적 속성이 충만하신 분이시며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면 엘리후는 하나님의 부분적 속성만을 고집하는 제한성과 오류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신앙의 교만은 하나님의 진리를 많이 알지 못하는 초신자 보다도 어느 정도 진리에 접하여 교회 생활에 어느 정도 연륜이 있는 성도가 저지르기 쉬운 잘못인 듯합니다. 따라서 신앙의 연륜이 더하면 더할수록 겸손의 자세를 견지해야 실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경솔한 판단과 말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곤경에 처하게 합니다. 늘 한번 더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여 신앙생활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원만하게 처신해야 할 것입니다.
9~11절 욥은 여러 차례의 독백을 통해 고난에 찬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는 세력 있는 자에게 학대받을 때이며 핍박을 당하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려 호소하며 기다리는 신앙을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고난 속에서 불평과 원망만을 일삼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욥이 토로한 불평과 하나님의 무응답에 대한 의구심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고 자기의 고난만 해결하려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나온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12~16절 본문에서 엘리후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간구한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원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은총으로서가 아니라 당연히 받을 권리로 여겨 교만하게 주장한다는 것이고, 죄를 범한 것을 먼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고 온전한 믿음이 없이 드리는 헛된 기도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욥은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적으로 삼는다고까지 불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받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언급합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현재 당하는 욥의 고난을 욥의 죄에 비교해 볼 때 오히려 가벼운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다른 세 친구보다 더욱 매몰차게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후는 세 친구와 달리 직접적으로 욥을 몰아붙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난을 더 깊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이해하려 했습니다. 이처럼 엘리후의 초월적 신관은 욥으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의 선언을 겸손히 듣게 하는 준비 단계로서 높이 평가될 만합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신앙적인 삶은 이 세상에서 핍박과 고난을 동반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위로와 더 큰 축복이 있을 걱이라는 사실을 성경의 여러 곳에서 증거 받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고난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는 인내, 소망, 끊임없는 간구, 회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실제로 큰 시럼을 당할 때 욥처럼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을 기다리다 실망하여 좌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을 확신하여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같은 신앙을 유지하고 더욱 진실한 생활에 매진해야함을 교훈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한편 신실하고 정직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필히 응답해 주심을 상고해 볼 때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는 기도하는 당사자의 불순종과 죄악됨, 그리고 의심과 완악함 등과 같은 문제점이 그 원인임을 배우게 됩니다.
◆나는 내가 실제로 아는 것 그 이상을 아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일이 없기를 원합니다. 실수가 없으신 주님을 찬양하며 나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원합니다. 얼마나 균형 있게 진리를 붙잡는지 돌아봅니다. 내 삶속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부으시어 거룩한 삶을 살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