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욥기 25:1~26:14)[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라]

꽈벼기 2023. 12. 1. 09:43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라]

(욥기 25:1~26:14)

 

1~3절 빌닷의 세 번째 변론입니다. 빌닷은 먼저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엘리바스가 앞에서 주장했던 진술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욥 자신도 우주에 가득 찬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묘사하여 빌닷의 변론에 응수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빌닷은 절대적인 능력이 하늘의 모든 질서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그의 엄위가 전 피조물에게까지 미치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빌닷의 의도는 하나님의 지극히 초월하신 능력을 먼저 거론하여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신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도록 하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6절 빌닷은 하나님과 비교해 인간의 미천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빌닷은 앞에서 제시한 하나님의 절대성에 기초해서 인간의 불완전함과 더러움을 묘사하고 있으며 천계의 존재라도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기 때문에 그보다 낮은 차원의 인간은 당연히 깨끗하지 못하다는 이론을 주장합니다.

 

여기서 빌닷이 의도하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비교 하면서 하나님의 눈에 깨끗지 못한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의를 변론한다는 것은 미련한 일이라고 주장하여 욥의 무죄성 발언을 우회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빌닷의 논리를 종합해 보면 그는 불순한 인간이 하나님께 자신의 무죄성을 변론하는 시도가 쓸모없고 무가치한 것이라는 사실을 욥에게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권위를 인간의 무가치함과 대비시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 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글로 전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욥의 변론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의 권능과 엄위를 특별히 높여서 표현하려는 의도 때문인 듯합니다. 특히 본장에는 인생을 벌레또는 구더기로 비유해 인간의 부패성과 유약성을 강조함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극적인 대비로 찬송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은 위엄이 있는 분으로 모든 피조물은 그 앞에 굴복하고 경배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에 결코 인간 스스로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임을 아르켜 주고 있고 끝으로 성도들은 우리 자신이 이처럼 약하고 쓸모없는 죄인임을 깨달아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야 함을 알게 합니다.

 

26:1~2절 사실 빌닷을 비롯한 욥의 친구들은 욥이 처한 재난을 도울 생각으로 나름대로 변론을 하였으나 그들은 오히려 번뇌케 하는 안위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사상에 기초해 말하므로 그 변론 자체로는 진리를 얘기하는 듯 했으나 욥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 결국은 사랑과 위로의 마음이 결여된 허공을 치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환난을 당한 욥에게 정작 필요했던 것은 죄를 질책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욥의 상황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굳게 잡도록 격려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3절 빌닷의 변론에는 참 지식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빌닷의 진술은 욥의 상황에 적절치 못한 적용과 진리의 외형적 사실만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지혜 없다고 비난하던 욥의 이해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욥은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이 음부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으며 뒷부분에 나오는 지혜를 찬양하는 시에서는 참 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욥은 이러한 사상으로 자신의 고난을 보고 있었기에 친구들의 인간 이성에 입각한 지혜에 대한 변론을 수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4절 빌닷의 변론과 욥의 주장과는 하등의 접촉점이 없었습니다. 사실 앞에서 욥이 주장했던 이론은 악인을 세상에 놓아두시고 그 악행을 묵과하시는 듯한 하나님의 섭리가 모순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닷은 하나님의 권능과 엄위에 비해 깨끗하지 않는 인간이라는 보편적 관점을 통해 욥이 죄인이라는 간접적인 주장을 했습니다. 따라서 욥은 본문을 통해 논점을 벗어난 빌닷의 변론에 대해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와 아울러 욥은 빌닷이 자신의 논지가 없이 엘리바스에게서 빌려온 이론을 이용해 변론을 되풀이 하고 있음을 공박한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얻을 교훈은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돕기 위해서는 그 상황을 잘 이해하고 위로하여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과 성도는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이 말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만한 것인지를 깊이 살핀 후 말해야 한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5~7절 욥은 지옥과 하늘에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빌닷의 주장과는 정 반대쪽에서부터 진술을 시작합니다. 빌닷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은 곳인 하늘에 통치 세력을 펴신다고 언급하였으나 욥은 하늘뿐만 아니라 음부에까지 지배력을 미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결국 욥은 이와 같은 비교적인 묘사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빌닷보다 자신이 더 자세히 알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표현된 묘사는 모두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데 이는 음부와 하늘이라도 그 창조자를 증명한다는 사상이 내포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8~13절 욥은 창조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싼다’, ‘빛과 어둠이 함께 끝나는 곳등의 언급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태양계의 법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꾸짖으신다‘, ’무찌르신다라는 표현은 논의의 여지가 있으나 자연계의 형상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려는 표현인 듯합니다. 따라서 이런 표현에 강하게 반영된 진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창조물을 전적으로 지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4절 욥은 인간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섭리가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는 위에서 얘기한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위대하심이 하나님의 전체 사역을 표현하는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에 해해 들은 소리도 매우 세미한 것으로 간주해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완전하심 중 극히 일부분임을 제시함으로 이러한 모든 일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제한적인 지식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결국 욥은 본 단락에서 하나님의 창조, 섭리의 사역을 크게 부각시킴과 동시에 인간의 이성은 그 섭리의 극히 일부분밖에는 볼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이런 결론은 신의 존재에 대한 불가지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욥은 하나님의 능력이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피조된 자연 만물 속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짙게 드리워 있는 욥의 의도는 인간이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를 모두 측량할 수 없다는 진술을 통해서 자신이 범죄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적으로 변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제한된 이성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섭리하심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결과를 놓고 어떤 특정한 원인에 의해 그것이 발생되었다고 간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얻을 교훈은 만약 하나님의 통치가 음부에까지 미치고 있다면 인간 세계, 특히 인간의 마음속까지도 살피시고 다스리심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조된 자연 세계를 볼 때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또 그 지으신 세계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되지만 이것은 단지 그 능력의 일부분이요 인간의 이성으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 또한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계시의 완성, 그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신앙을 본받아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분의 엄위와 화평과 광명처럼 좋은 것은 다시없습니다. 실로 엄위는 그분의 의에서 나오고 화평은 그분의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이며 광명은 그분의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소중하게 받아 누리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탁월성은 역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를 능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안목으로 보면 인간에게는 의로운 자가 없고, 깨끗한 자가 없으며, 존귀한 자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반드시 영접하여, 저런 비극적인 한계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본래의 존귀성을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체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학문적인 지식과 지혜가 있어 남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문제는 인간의 육체적인 힘과 지혜와 지식을 다 동원한다 하더라도 절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 문제만은 남에게 기대하지 말고, 오직 단 한 분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만 바라야 하는 것입니

 

욥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여 준 것은 실로 우리들의 영혼에 지대한 도움을 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신성과 인성이 있음을 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비단 저 광대한 우주를 보면서 뿐만 아니라, 산과 바다 그리고 한 포기의 풀과 한 그루의 나무를 보면서도 하나님께 경배하는 마음을 가지고 감사해야 합니다.

 

자신의 옷을 입고는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분의 의로 옷을 입혀 주실 때만 우리는 깨끗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낮추시고 자신의 높으심을 되새겨 주시는 반면에 그의 세 친구 말에 엄중하게 처리하시는 것을 봅니다. 높으신 주님을 알아가길 원하며 보다 겸손히 섬기며 순종하며 살아가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는 마음과 순전한 마음으로 서 있길 원합니다. 다른 형제가 실족하면 탓하기 보다는 위로와 평안을 주는 말을 하며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하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