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2:1~30)②[네가 악인이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네가 악인이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
(욥기 22:1~30)②
1~11절 엘리바스의 변론은 욥의 죄에 대한 비난입니다. 직접적이고 공격적인 면이 보입니다. 전에는 엘리바스와의 변론을 보면 우회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을 통해서 욥이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을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엘리바스는 자신의 변론이 욥에게서 인정을 받지 못하자 마지막으로 욥이 바로 그 죄인이라는 비난을 던지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구체적인 욥의 죄목까지도 예를 들어 말하고 이러한 죄로 인하여 고난이 임한 것이라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는 자신의 사상에 투철한 엘리바스가 가지고 있는 지혜의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테두리에서 그 지식과 진술을 정당화시키려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가 가지고 있었던 추론의 전제는 여전히 인과응보의 사상입니다. 첫머리에도 그는 삼단 논법에 입각해 욥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고난은 죄의 결과이다 너는 고난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죄를 범했다’ 라고 하는 추론 방식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와 지혜에 무관하시다. 욥은 징벌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욥의 죄악이 크다’라고 자신의 진술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엘리바스의 논리는 그 자체가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와 무관한 분이시라면 사람이 고통당하는 원인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의 인과응보론도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엘리바스가 주장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와 무관한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동일하게 하나님이 인간과 이 세상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이라고 덧붙여서 입증합니다. 결국 엘리바스가 제시하는 하나님은 초월자이실 뿐 이 세상에서는 부재자인 이신론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관을 부인하고 성경은 하나님을 초월자이시면서도 인간의 일에 관심을 갖고 관여하시는 인격자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죄인 하나가 돌아옴으로 하늘에서 기뻐함이 더하리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엘리바스가 고발한 욥의 사회적 죄악들은 전적으로 상상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그 일련의 죄악들은 무자비하게 강탈한 죄, 가혹할 정도로 불친절한 죄, 권세를 이용한 뻔뻔스런 강도죄, 과부와 고아를 무자비하게 학대한 죄 등으로 상술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죄악들은 현재뿐 아니라 당시 부자나 권세자들이 쉽게 범할 수 있었던 사항으로서 엘리바스가 욥의 고난에 대한 확실한 원인을 제공하기 위해서 욥에게 적용시킨 죄목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본 항목들이 윤리적 사회 정의 실현을 많이 얘기했던 예언자들의 교훈의 내용과 거의 맥락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비난은 선지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이거나 모함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결국 위의 내용에서 엘리바스와 같은 잘못된 하나님의 인식은 그의 신앙생활과 생각 전체를 극단적이고 편협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으로 변질되어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12~20절 엘리바스는 하늘과 별의 높음을 통해서 그곳에 계신 하나님의 절대 초월성을 강조함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뚜렷한 격차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엘리바스의 신앙은 우주적 자연 법칙을 주관하면서도 그 자연 법칙에 메이지 않고 초월자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실제적 무신론자의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특별히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또 다른 사실 한 가지는 노아 홍수 이전에 살다가 멸망했던 악인들의 불신앙을 기초로 해서 엘리바스가 욥을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엘리바스는 홍수 전에 멸망한 세대들이 갖고 있었던 불신앙을 말할 때 욥이 했던 말을 인용함으로써 욥을 불경건한 자로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닥친 재난 역시 대 홍수 심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바스는 홍수 심판과 욥의 재난을 연결시킴으로 선인과 악인에게 일어나는 불공평한 현실에 대한 욥의 주장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의 마지막 두 절은 시편의 결구에 자주 쓰이는 표현으로서 의인의 승리에 대한 소망과 기다림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리바스가 모든 것이 불사른바 된 욥을 불경건한 악인으로 취급하여 결국은 자신이 의인이요 끝에는 기뻐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본문의 내용에서 우리는 홍수 때에 불경건한 자를 멸망시키신 하나님은 비록 선하신 성품이 있으시지만 항상 악인들을 회개로 인도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과 이러한 악인의 멸망을 통해서 성도들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알아 스스로를 돌아보며 조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21~30절 욥을 죄인으로 간주하여 비난했던 엘리바스는 여기서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할 것을 종용합니다. 유화적인 태도로 돌변하였습니다. 정말 화목을 통해 매혹적인 축복의 약속들이 미화되어 나타납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엘리바스가 여전히 욥을 죄인으로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의 실체는 욥에게 ‘불의를 버릴 것’, ‘탐심을 버릴 것’ 그리고 ‘겸손할 것’ 등으로 충고하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소발이나 빌닷과 다름없이 욥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자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아집니다. 그래서 그는 욥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기를 권면하면서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회개하는 행동을 중요시하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은총을 간과한 채 욥의 회복이 욥의 회개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엘리바스의 그릇된 신앙을 보여 줍니다.
엘리바스가 제시한 구체적인 복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능자에 대한 신앙의 회복과,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것과, 경영하는 일마다 성취됨을 말하고 있으며 끝으로 욥을 통한 도움의 효력이 건지심으로 나타 내 보이고 있습니다. 사실 엘리바스의 변론은 욥을 죄인으로 전제하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이러한 내용은 구약의 일반적인 약속과 같은 맥락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 세계 속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가 본문에서 말하는 축복의 논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제한하고 인과응보적 내용으로 회개가 곧 축복이라는 논리를 공식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이론 전개에 입각하여 강조하고 있으며 엘리바스의 예언자적 성격을 이용하여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계속 되던 논쟁의 결말을 예견토록 하고 있습니다. 무죄한 자의 입장에서 욥을 정죄하던 엘리바스는 결국 유죄한 자가 되어 종국에는 욥의 중재를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이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와 회개를 받으시는 사랑 때문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고난 받는 자에게 다가가는 성도의 태도는 경멸과 비난이 아닌 사랑과 격려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사람의 눈은 무엇이나 잘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무엇을 본다고 했을 때, 그는 대상을 대상 그대로만 보지 않고 항상 자기의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특히 남의 인격과 행동과 양심에 대해 절대로 속단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속단은 상대편에게 실로 엄청난 피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죽어야만 산다’ 는 말씀과 함께 ‘버려야만 얻는다’ 는 말씀도 기독교 진리의 원칙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실을 실행함으로써 다 같이 하나님을 참된 보배로 소유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하겠습니다. 흔히 신앙생활은 받은 것 위에 더 받게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가 기복적으로 흐르게 된 듯 보입니다. 세상의 것을 버려야만 하늘의 것을 얻을 수 있고 마침내는 하나님까지 최상의 보배로서 소유하게 됨을 마음 깊이 되새겨 참 보배를 소유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측으로 남을 정죄하지는 않는지 돌아봅니다. 또 나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관계에 손상을 입히는 조급한 악습을 버리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안 된다는 말을 종종 할 때가 있었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다시금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그 뜻 가운데 순종하는 자가 되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