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욥기3:1~26)②[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꽈벼기 2023. 11. 7. 16:13

[어찌하여 고난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욥기3:1~26)

 

1~101절에서 욥이 입을 열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장엄하고 엄숙한 말을 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욥의 탄식은 순간적인 격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깊은 사고 끝에 토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은 일반적인 사물을 의인화시킨 후에 세밀한 저주를 전개합니다.

 

그것은 해와 달의 일력으로부터의 추방, 즐거움의 결핍 상태, 마법사와 같은 자에 의한 저주, 어두움에 대한 동경 등입니다. 이같은 욥의 저주에 사용된 언어들에는 장엄한 상상력이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반복법과 대구법도 사용되어 저자의 문학적 재능을 돋보이게 합니다.

 

욥의 탄식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고려하지 않은 말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사라가 이삭을 얻고서 기뻐했듯이 욥의 어머니도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러한 탄식을 함으로 그를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었습니다. 또한 욥의 이 같은 탄식은 자신의 불행이 앞으로도 계속되리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인 듯 합니다.

 

사탄의 궁극적인 목적이 실현되는 듯이 보이는 욥의 탄식에는 사탄은 욥이 자신의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저주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엄격한 율법으로 보자면 사탄의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볼 때 사탄의 목적은 패배한 것입니다.

 

육적인 불만이 계속 터져 나옵니다. 순종에 약간의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인간의 모든 완전함에는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욥은 서로 비슷한 의미를 가진 말들을 계속 반복함으로써 그의 슬픔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욥의 가장 큰 슬픔은 그의 엄청난 고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심의 상실에서 온 것으로서 보아집니다.

 

인간의 혀는 죄의 온상이 될 수 있음과 아무리 극심한 환난과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말씀을 기억하여 겸손함과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앙모하는 생활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11~19절 자신이 죽어서 나왔더라면, 출생 단계에서 죽었더라면, 그리고 출생 이후에 곧 죽었기를 바라는 자책적인 탄식으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한편 욥의 사후 세계를 잠든 상태이며, 비존재에 가까운 상태, 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말에는 욥이 이해하는 사후관이 암시되어 있음과 아울러 한걸음 더 나아가 욥이 무덤을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곳으로 인식하기까지 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절망적인 모습을 한탄함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욥은 마음의 결렬함과 혼란함 가운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탄식은 마침내 위로받기를 거부하는 몸짓으로 나타납니다. 심지어 욥은 극심한 현재의 고통을 탄생 때에 사산되지 못한 것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사실 욥의 탄식처럼 거듭남이 불가능하다면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하여 생명에 대한 욥의 의문이 해결되었습니다. 진정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가운데 속할 수 있게 된 사실은 오늘 날의 성도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의 세계가 지닌 특징을 잘 표헌한 곳은 성경의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평안의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생명의 근원에 대한 반역인 바 이는 그만큼 욥의 고통이 큼을 암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얻는 교훈은 하나님의 가장 고귀한 선물인 인간의 생명이 과소 평가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무덤은 슬픔의 도피처로 행각하고 이해하기에는 너무 빈약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죽음에 대한 욥의 의문을 역설적으로 상고하여 삶 속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신비한 목적을 깨달음과 아울려 삶이 수반하는 엄숙한 책임을 이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20~26절 욥은 인간의 삶을 슬픔의 연속뿐이라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삶과 생명은 고난 속에서도 은혜롭게 지속될 수 있는 것으로서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당신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성도의 마음을 시험하신다고 하였으며 하나님께서도 징계를 통하여 오히려 더 나은 길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은 성도의 믿음의 상태를 시험하고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 보다 온전한 성화를 위해서, 미래의 영광과 행복의 향상을 위해서, 신실하고 권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불행이 계속될 것을 염려하였기에 이로 인하여 미래에 대한 두려움마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근심이 세속적인 부주의로부터 보호해 줄 경우에는 유익하지만 하나님의 귀속적인 사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유해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내용을 통하여 성도들은 현실적인 축복에 대해 지나친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욥은 현세적인 풍요에 눈을 두지 않고 하늘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인간의 조심이나 경건함이 인간을 재난으로부터 지켜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역사 가운데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의 이치는 인간의 방법에 의해 함부로 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고난을 없애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들이 고난 중에 있을 때 그들에게 힘과 위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온갖 죄악과 불행으로 얼룩진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특히 견디기 힘든 고난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을 여러분의 것으로 간직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진정 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찾아봅니다. 환난 가운데 빠진 자들을 어떻게 대하며 위로와 사랑을 주고 있는지 생각합니다. 때로는 내가 처하고 있는 상황이 나를 당황하게 할 때 한 두 번이 아니나 그때마다 주님께서 사랑을 드러내기를 기다립니다. 좌절된 나의 모습이 말씀으로 회복되길 원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앞으로 나가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