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8:4~17)②[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침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침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
(예레미야 8:4~17)②
4~12절, 유다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언약 공동체 내에서 율법을 복사하고 해석하는 역할을 감당하던 서기관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거짓되게 기록함으로써 백성들을 심각한 무지와 죄악의 구렁텅이로 전락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사용하여 일체의 희망이 단절된 상황 속에서도 거짓된 소망을 불어넣음으로써 진실한 회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율법을 맡은 직분 자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긴 나머지 하나님의 율법이 자신들과만 함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오만한 자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또 다른 말씀을 가지고 그들에게 나아온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율법 내에 갇혀 있었다고 생각하는 유다의 지도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된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유다가 고집대로 ‘전쟁터를 향하여 달리는 말같이’ 저돌적이고 무모한 행위를 하면서도 고의로 자신들의 행한 일에 관하여 후회를 표현하거나 회개하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자연계의 새들이 그 시기와 때를 알 수 있는 직관적인 지식을 통하여 자연의 흐름에 자동으로 응답하는 것과는 달리 유다 백성은 삶의 준거인 하나님의 규례를 알지 못하였음을 밝힙니다.
지도자들은 유다 백성들에게 오도한 판단을 제공함으로써 죄악 된 현실을 평안의 상태로 규정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거짓된 이상을 촉발케 되었으며 급기야 우상숭배를 하면서도 전혀 거리낌 없는 마비된 양심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서기관과 제사장들의 잘못된 인도가 언약 백성인 유다의 보편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여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파기하는 상황으로 전락시켰다는 진단입니다.
13~17절, 농경 방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확하시기 위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나아가십니다. 그러나 생산성이 전혀 없는 농장처럼 나무에는 포도도 무화과도 없었습니다. 다만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들뿐이라고 합니다. 마치 선택한 포도나무가 변질하여 들 포도나무가 되었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가 잘리는 것처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거부하고 죄악을 일삼는 백성에게는 당연히 멸망이 임하리라고 선포합니다.
유다를 공격해 오는 적에 대한 상징이 ‘뱀과 독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13절에서의 농경으로 인한 상징과 잘 부합합니다. 당시 농사에 있어서 가장 해로운 것이 바로 이 독사들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사실에 착안하여 유다에 대한 적의 공격이 인위적인 술법으로도 없앨 수 없는 독사의 침입처럼 필연적인 사실이 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지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 들어가서 거기서 멸망하자’와 같은 외침은 정말 가운데서 부르짖는 비명으로서 유다 백성들이 설령 자기 방어책을 강구한다 할지라도 헛될 뿐임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유다의 위기에 대한 인식은 앞 단락에서의 ‘평강하다’라고 외쳤던 사실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도 큰 차이가 납니다.
유다는 심판을 당해서야 비로소 이전 상황이 평안한 상태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조차 단지 외형적인 수납에만 머물렀으므로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되고 말았습니다. 죄악의 궁극적 결과는 심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징계 상황 속에서 외침은 자칫 죄악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불만에 기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바른 회개란 과거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자기 성찰과 방향의 전환을 수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잘못에 대해 외면적 후회에 그쳐서는 안 되며 근본적인 개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일을 향해 달려가고 했습니다. 나에게 무언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기쁨을 빼앗아가는 죄를 주님께 회개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