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로마서 9:19~29)②[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꽈벼기 2023. 6. 14. 11:16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로마서 9:19~29)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원리를 밝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약성경의 여러 예를 통해서 더욱 명백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 단락에서는 구약 성경에 나타난 사건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원리를 보여 주기에 충분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들을 유형별로 나누어 보면 진노의 그릇긍휼의 그릇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진노의 그릇에 해당하는 사람은 애굽 왕 바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대항했던 바로의 강퍅한 마음 역시 하나님께서 행하신 섭리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에서는 특별히 세웠다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바로에 대한 선택은 성도의 구원과는 질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것은 세상의 선악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진행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생명을 빼앗는 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생각해 볼 때, 바로의 생명이 열 재앙이 계속되는 동안 유지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역시 하나님의 깊숙한 간섭 아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긍휼의 그릇에 해당하는 대상은 이스라엘인데, 하나님의 긍휼은 시대마다 다양하게 베풀어져 왔습니다. 본 단락에 인용된 인용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보여 준 하나님의 긍휼을 잘 증거해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약성경이 직, 간접으로 인용되고 있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합니다.

 

간접인용인 15절은 출애굽기 33:19의 인용이고, 20, 21절은 이사야 29:16과 예레미야 18:6의 종합적 인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기장이 비유는 죄악 된 인간이 할 수 있는 질문의 맹점을 지적해 주기 위해 이 비유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왈가왈부하는 인간은 자신의 피조물적인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자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직접인용은 출처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간접인용과 구별이 됩니다. 이 인용은 하나님의 구원 대상이 유대인이라는 민족적인 범주를 뛰어넘어 이방인이라는 범 우주적인 차원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구약성경의 호세아서와 이사야서를 통해서 밝히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원래 호세아서의 예언은 이스라엘 열 지파의 불신과 그 회복에 대한 말씀이었으나 이 구절들은 이방인의 그것과 상응한 데 착안하여 호세아서의 구절을 인용합니다.

 

이사야서의 인용은 더 적극적인 이방인의 구원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이 말씀들은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어떤 자들은 구원을 받지만 이스라엘 가운데 어떤 자들은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구약성경의 인용입니다. 특히 이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에 대한 예언을 하셨는데, 이것은 대다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구원에서 제외될 것임을 반영해 주는 사상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은혜를 주시지 않으셨더라면, 그들은 소돔과 고무라 성이 멸망한 것처럼 멸족되었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구원의 씨를 보존해 주셨습니다.

 

22절 하반 절에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3절에는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2절의 진노의 그릇앞에 있는 수식 부분과 23절의 긍휼의 그릇을 수식하는 부분을 비교, 검토해 보면 진노의 그릇에는 멸하기로 준비된이라는 수식어가 있는데, 이것은 멸하기로 정했다라는 선언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즉 진노의 그릇은 이미 운명 지워져 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진노의 그릇에 해당하는 죄인인 인간은 분명 그 자체로 심판을 받을 만하지만 확정된 선고는 유예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애써 드러내고자 했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진노의 그릇은 멸하기로 준비되었을 따름이지 멸망이 이미 선고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긍휼의 그릇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라는 수식어는 영광 받기로 정하셨다라는 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긍휼의 그릇 그 자체가 영광 받을 만한 자격이 갖춰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렇게 정하셨다는 것뿐입니다.

 

한편 이것과 관련해서 또 다른 사실을 살펴보면, 22절 하반 절에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라는 구절이 있고, 23절 하반 절에 보면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분 또한 각각의 수식어가 주는 의미와 유사합니다. 즉 진노의 그릇에 내려야 할 진노는 하나님께서 인내하시고, 긍휼의 그릇에는 은혜를 풍요롭게 부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의 그릇에는 돌이킬만한 기회를 주셨고, 긍휼의 그릇에는 미리 은혜를 부어주심으로써 가던 길을 계속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세밀한 구분은 사도 바울이 단어를 엄밀하게 구분 사용한 데서 비롯됩니다. 이런 사실들은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폭군의 무분별한 횡포라든지 전횡과는 엄격한 구분이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이며 그 선택은 이방인에게나 이스라엘인에게나, 차별 없이 열려 있는 가능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선택은 말씀을 통하여 이미 예정된 것이기에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 안에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체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깊으신 선택의 의미를 증거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그 속 내용이 전혀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선택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신분의 변화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 질문하기보다는 내게 베푸신 사랑에 감사하도록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