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로마서 8:1~17)②[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꽈벼기 2023. 6. 10. 11:4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로마서 8:1~17)

 

1~11, 바울은 1~11절과 12~17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는 갈라디아서 5:16의 말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7장에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8장에서는 성령이 계속 언급됩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의 승리와 소망의 생활을 묘사합니다.

 

구조적으로 볼 때 본 장의 서두인 1~4절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내용을 소개하려는 변환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1절에 나오는 그러므로 이제가 나타내는 것은 시간적이며 논리적인 지금입니다. 즉 믿음의 사실은 언제나 새 세계를 열어줌으로 시간적인 지금이 됩니다. 결국 본 단락의 서두는 정죄의 폐기, 해방의 선언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결의에 소급하여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귀결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 도중에 있는 성도들과 성령의 관계의 출발점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에는 6, 7장에서 주도권을 지니던 죄, 죽음, 율법이란 단어 대신 영과 육의 대조가 두드러집니다. ‘는 모두 다섯 번 나타나지만 3절 이후에는 단 한 번만 나타날 뿐이며 죽음2, 6, 38절에 단 세 번만 나타나고 율법역시 본 장 전체에서 4~7절에서만 다섯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용어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본 장의 성격을 가장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이제 성도에게는 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이 영이 성도들의 양자됨을 증거 받고 장래를 보증 받으며 그들의 성화의 삶을 계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적 표현은 법과 법의 대조입니다. 즉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의 대조입니다. 이것은 4절 이후에는 영과 육의 대조, 몸과 영의 대조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지막 특징은 본문에 나타난 조건절 용법입니다. 9~11절은 조건절로서 이루어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사용된 계시다면은 조건이나 고려가 아니라 전제요 사실입니다. 이 세 구절은 바울의 확신을 보여주는 것이며 바울은 우리에게 자신의 이 확신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서에서는 두 종류의 정죄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이며 객관적인 정죄이고, 또 하나는 내적이고 주관적인 정죄입니다. 외적인 정죄는 하나님에게서 오고 내적인 정죄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옵니다. 본서의 앞장들은 하나님의 객관적인 정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장인 7장에서는 내적이고 주관적인 정죄가 발견됩니다.

 

두 종류의 정죄에 대한 치료법을 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피는 객관적 정죄에 대한 치료법이고(1), 생명의 성령 즉 생명을 주시는 영은 주관적 정죄에 대한 치료법입니다. 주관적인 정죄 아래 있을 때 우리에게는 생명의 성령이 필요합니다. 객관적 정죄의 치료가 단 일회로 완전하게 완료됐지만 이 주관적 정죄에 대한 치료는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9), 그리스도의 영(2), 성령(2)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3절은 율법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말합니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율법은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둘째로,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케 할 수 없습니다. 즉 우리 육신에 죄라는 세균이 묻어 있어서 율법은 우리를 위해 혹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율법을 주심으로써가 아니라 이들을 주심으로써 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이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는 죄를 인하여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또한, 예수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언급하신 대로 광야에서 모세가 달아 올린 놋뱀으로 예표가 되셨습니다. 놋뱀은 뱀이 형상을 나타냈지만 뱀의 독은 없었습니다. 뱀의 본질은 없이 뱀의 모양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도 죄의 모양을 취하셨지만, 그 안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죄의 본질과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 우리를 위하여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오셔서 율법으로는 할 수 없는 그 일을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은 9-11절에 나타나는 세 가지 확신입니다. 즉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이 계시므로 우리는 영의 사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므로 우리는 의로운 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므로 우리는 몸까지도 부활하여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2~17, 이 부분은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 혹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신분으로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는 성도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믿는 이들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고 성도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족적 이미지를 통해서 매우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양자법과 히브리의 가족주의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서신의 수신자들에게 아주 쉽고 강력한 설명이 방법이었습니다.

 

본문을 포함한 14~17절은 9절에 대한 설명입니다. 18~30절은 10~11절에 대한 설명입니다. 또한 15~17절은 갈라디아서 4:6, 7절과 평행 구를 이루는데 이곳의 핵심 요소는 아바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이 전통은 예수의 일생을 회고하는 초대 교회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것으로 받아 들었습니다.

 

양자 된 성도의 삶‘, 양자 된 성도들은 성령의 빚을 갚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빚은 갚는 방법은, 첫째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 즉 육신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는 바로의 법, 애굽의 법을 따라 살았지만, 광야에 와서는 하나님의 인도와 법을 따라 산 것처럼 성도들도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 성령께 진 빚을 갚는 길입니다.

 

양자 된 성도들은 성령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즉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친근감과 사랑과 신뢰감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살 때 하나님 아버지는 무엇이든 다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된 우리들은 하나님의 후사가 될 소망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상속받는 조건으로 바울은 현재의 고난에 대한 성도의 견인을 들고 있습니다. 이 고난은 아들이 후사가 되기 위해 받는 수련의 과정인 것입니다 .

 

결국 본문을 통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영적 결합이라는 원리적인 사실을 부모와 아들 됨이 예로 설명했으며, 이 결합은 원리로만 그쳐서는 안 되며 현실적인 신앙생활에서 확인되고 입증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와 영적으로 일체가 된 자가, 이 육체를 갖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생활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주로 모시고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되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거하고 성령이 그를 위하여 탄식하면서 기도하고 또 모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선을 이루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이것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세상의 방법대로 세상의 일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일을 전심으로 추구하며 살 뿐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원하며,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합니다. 나의 의지와 생각이 오직 그리스도의 영을 좇아가길 원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웃에게 복된 소식을 널리 전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