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1~14)②[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로마서 6:1~14)②
1~11절, 이미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이 죄악 된 세상을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가 하는 성화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특히 본문은 이신득의의 원리를 율법 폐기론적 방탕 주의로 곡해하는 경우에 대해 강력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다고 하는 연합의 원리에서 출발하는 성화의 당위성을 주장합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이해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대속적일 뿐 아니라 인류 구원의 전형적 사건입니다. 즉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를 깨뜨리신 그리스도를 따라 다시는 죄로 하여금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칭의론의 논리에 따른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가능한 한 많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라는 질문이 5장에서 결론 부분인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구절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즉 본 서신의 독자인 로마교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여 이 말씀을 죄를 허용하는 면허장과 같이 여기고 그와 같이 질문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그럴 수 없느니라’고 잘라 말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들이 계속 죄를 지을 수는 없다고 공박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성도들이 결코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더는 죄의 지배를 받는 생활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직 완전한 거룩함을 얻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의 생활은 그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 방향 전환입니다. 비록 현재는 불완전해도 생활의 목적과 방향이 바뀌었으니 이 방향 전환만 되어 있으면 우리는 애써 탈선하지 않는 한, 성령에 인도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성화의 근거요 기본 원리가 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는 이 방향 전환의 주장을 세 가지 비유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세례의 비유입니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만나는 것, 즉 죽음에서 그리스도와 합쳐진다는 상징입니다. 또한, 세례는 두 가지 면에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를 일치시킵니다. 먼저 그는 부활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신다는 것과의 일치이며, 다음으로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 위해 부활하셨다는 것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특히 3절과 4절에 나오는 ‘합하여’는 ‘안에 들어간다.’,즉 ‘예수 속에 들어가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결합 또는 일치를 의미하되 바깥에서 접촉하는 외적 결합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것 속에 들어가는 내적인 결합입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의에 대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죄 안에 머문다면 그것은 마치 세례를 받고 물속에서 올라온 자가 여전히 물속에 머무는 것과 같은 난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 접목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죄의 줄기에 있던 가지였습니다. 그때는 죄 속에서 죄에 의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죄에 붙어 있던 우리의 가지는 잘려져 그리스도의 줄기에 접붙임이 되었습니다. 접붙임을 받았으므로 줄기에서 오는 영양분을 받아 줄기와 함께 새롭게 살아갑니다.
셋째 형사 소송의 비유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비유입니다. ‘죄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법률상의 용어이며, 죽은 자는 그 생전에 행한 범죄에 대하여는 근본으로 되돌아가 살피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큰 죄를 범한 자라도 고발하기 전에 또는, 재판이 끝나기 전에 죽어버리면 유죄 판결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리고 한번 죽은 자는 다시 죽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한번 죽었다가 이미 부활하였으므로 다시 죽지 않으며, 죽음에 대한 그의 승리는 절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자석에 결합하는 것이며 이 자석과 같은 자기를 우리도 띠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짓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교제에 계속해서 머물지 않음으로써 부주의하게도 죄가 육신을 자극하도록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는 자기가 율법을 지켜 실행할 힘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율법주의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계속하여 인정되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세속주의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보다 긴밀하게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교제에 결합되어 있을 때 우리는 더욱더 하늘의 것을 구하게 됩니다. 둘째로, 자기 힘으로 의를 행하려는 율법주의에서 해방되고 성령에 의한 자유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함과 은혜의 풍성함을 알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 주지 않고 하나님께 드려 의를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하나님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12~14절,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믿음을 지닌 자들에게 이제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모든 죄악을 퇴치하고 정복해 나가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영적 군사로서 일어설 것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성도가 삶의 과정에서 선한 싸움을 싸워가야 할 일차적인 장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기에 세상 현인들도 ‘네 자신을 알라’, ‘극기의 덕’ 등을 말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보여주는 자신과 싸움은 죄로부터 행방된 새로운 피조물의 책임과 의무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주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의 수단을 가지고 정욕과 현세의 악한 세력과 선한 싸움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주장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얼마나 그리스도와 연합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합시다. 근본적으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이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이 그의 삶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 그 자체가 하나님만을 위하여 사는 하나님 나라의 내용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형식으로나 겉모양으로서가 아니라 그 실질적인 내용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성도들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의 마땅한 삶을 살길 원합니다. 죄악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의의 무기가 되길 원하며 옛 주인인 죄가 나를 다스리려 할 때 단호히 거절하는 믿음을 주시길 원하며, 날마다 죄악을 정복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