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0:1~23)②[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사무엘상 20:1~23)②
1~11절 요나단은 지금까지 다윗에 대한 사울의 질투심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아마도 요나단은 이전에 행해졌던 자신의 화해 노력이 여전히 효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 듯합니다. 사울이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각별한 우정을 보고서는 요나단에게 자신의 본심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매우 급한 위기의식은 그 같은 상황에 부딪쳐 있는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절실히 느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사울은 라마 나욧에서의 신비적 체험을 한 후 어느 정도의 정신적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바로 이 같은 일 때문에 다윗도 사울의 왕궁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극심한 변덕을 이미 체험한 바 있는 다윗으로서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사울의 본심을 파악해서 알려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해서든지 사울의 왕궁에 계속 머물기를 염원했습니다. 물론 그는 사울을 피해서 도망하려는 의도가 있기는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울이 자신을 해하려는 낌새를 확인한 다음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필연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에 오를 것을 확신하면서도, 자신의 현재 상전인 사울에 대해서 끝까지 충성하려고 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본심을 파악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이 같은 점에서 요나단은 안성맞춤의 적임자였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요나단은 그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간섭 하심입니다.
12~23절, 여기서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우정이 얼마나 고상한 것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요나단이 다윗에 대해서 품고 있었던 우정이 세속적인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그가 다윗을 위하여 치명적인 희생도 감수했다는 사실입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자신 간의 우정이 어떻게 열매 맺어져야 할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다윗이 왕에 오를 때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선처가 있기를 다윗에게 부탁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요나단의 부탁은 절대로 그의 이기심에서 나오지 아니했습니다.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자라면, 현재의 그에게는 부족함이 전혀 없는 자입니다.
요나단에겐 하나님의 뜻을 확연히 읽을 줄 아는 영안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반면에 자신의 아버지에게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떠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같은 깨달음은 말할 나위도 없이 영안의 소유자에게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자신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도움 요청은 절대 굴종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밝히 볼 수 있는 영안의 소유자만이 자신과 가족 친지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가야 함을 배웁니다. 이것이 영생을 얻은 자가 죽음을 앞두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직 주를 믿지 않는 사람은 속히 죽음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이 바로 은혜받을 때요,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친구가 되시는 주님께 나의 사정과 형편을 고합니다. 환란과 고통을 겪을 때 믿음의 지체들에게 도움과 기도를 부탁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인 줄 압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지금 겪고 있는 일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 분별하며 살아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