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창세기 38:1~30)[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꽈벼기 2020. 9. 3. 08:20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창세기 38:1~30)

 

유다와 다말의 근친상간이 발생하게 된 배경적 설명으로,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후 힘없이 흩어진 야곱 집안과 그 집안의 실질적 장자인 유다의 행실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의 계보를 잇는 선민 이스라엘의 가문은 야곱 때까지만 하여도 이방인과의 통혼을 엄격히 금함으로써 그 순수성을 보존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에 이르러서는 가나안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들임으로 혈통의 순수성은 그 색이 바래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통혼의 결과 유다의 집안은 그 자손들까지도 가나안 인들의 타락한 도덕성에 심각히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본문은 이 같은 사실을 하나하나 증명해 주는데, 먼저 1-5절은 유다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입니다. 그리고 6-7절은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며느리 다말을 맞아들였으나 엘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다 죽임당하였다는 기록입니다. 아마 유다는 방탕한 아들의 성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조혼을 시킨 듯합니다. 그러나 엘은 결혼, 후에도 여전히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다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였는데 분명히 그 근본 원인은 성적 죄악에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8-10절은 히브리 계대 결혼 법에 따라 유다가 둘째 아들 오난에게 그 의무 이행을 요구하였으나 오난이 이를 이행치 아니하다 역시 하나님의 진노를 사 죽임당하는 장면입니다. 마지막으로 11절은 유다가 막내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주기를 꺼려 거짓 약속을 주어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입니다.

 

이처럼 불성실한 유다의 태도는 결국 다말이 간계를 꾸며 유다를 유혹하게 한 동기가 되었는데, 집안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며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해야 할 유다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온 집안에 미친 화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12~26, 시아버지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유다의 불성실한 태도와 상처로 인한 정욕에로의 유혹, 그리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문의 씨를 이르려고만 한 다말의 인본주의적 생각이 어우러져 마침내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근친상간이라는 치욕스런 불륜이 자행되고 만 단락입니다.

 

그중 12~15절은 유다의 외유소식을 접한 다말이 창녀로 분장한 후 기다리고 있다가 유다를 유혹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16~18절은 유다가 약조 물을 주고서 다말과 상관하는 장면이고, 19~23절은 유다가 친구를 시켜 창녀에게서 약조 물을 찾아오려 하였으나, 허탕 친 장면입니다. 끝으로 24~26절은 그 후 다말의 잉태 소식을 접한 유다가 그를 정죄하려 하였으나 자신과의 불륜의 관계에 의한 임신임을 확인케 되는 장면입니다.

 

이상에서 목적 달성을 위해 시아버지를 유혹한 다말의 뻔뻔스러움과 다분히 창부적인 그녀의 기질에 대하여 성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문화적으로 문란한 성도덕을 개의치 않는 가나안 지방에서 성장하였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녀의 태도에는 일말의 동정의 여지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녀는 계대 결혼의 정당한 권리에 따라 자신의 후사를 잇겠다는 일념에서 행동하였으니 이를 비난할 수만도 없습니다. 대신 근본적인 잘못은 유다에게서 찾아야 하는데, 그는 계대 결혼 법을 이행하겠다는 자신의 약조를 깨뜨린 잘못과 아울러 신전 의식이 모자랐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습니다.

 

다말이 창녀로 분장하여 유다를 유혹하였긴 하나 그녀를 보고 음욕을 품은 유다는 이미 자신이하나님 앞에놓여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범죄 후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보다는 그 범죄를 은폐하기에 급급하였으니 전혀 동정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다말 사이에 메시아를 탄생시킬 씨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는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에게 한없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증거인데, 자신의 부패함과 연약한데도 인간이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27~30, 유다와 다말 간의 불미스런 사건이 베레스와 세라의 탄생으로 끝을 맺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중 27절은 다말이 쌍둥이를 수태하였다는 기록입니다. 그리고 28, 29절은 동생 베레스가 형을 제치고 먼저 탄생한 데 대한 기록입니다. 마지막으로 30절은 세라의 출생 기사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처음부터 유다와 다말 간의 불륜을 주제로 삼으려 했다면 결론을 이렇게 맺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한 주제를 논의하면서 결코 장광설을 늘어놓아 초점을 흐리는 일을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구속사의 흐름을 타고 있는 중요 의미를 파악해 내어야 하는데 곧 베레스에 관한 것입니다. 분명 베레스는 유다와 다말로 인하여 죄악 중에 출생한 자녀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의 조상이 되었으며 그의 혈통을 좇아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죄악 중에 출생한 베레스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 가운데 구속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예표론 적으로 아담의 죄 가운데 출생한 우리 죄인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음을 나타내 주는 구속사적인 사건입니다. 실로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그의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진리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 지식을 아무리 많이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영적으로 어리석으면 신앙생활이 바로 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메일 세상의 갈등과 염려 속에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영적인 어리석음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진정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기쁨과 감사로 복된 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순간순간을 살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가책을 받는 대로 자신이 잘못된 길에 있음을 깨달으면 속히 돌이켜야 합니다. 내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지만 말고 양심이 가책하는 대로 바른 판단을 해야 합니다. 양심이 알려주는 무서운 죄의 결과를 깨닫거든, 속히 같은 범죄에서 벗어나 의의 길로 힘차게 전진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에 방관자가 되지 않길 원합니다. 나의 죄를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어떤 죄라도 용서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며 또한 용서하여 주실 것을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죄의 실체에 맞서야 할 경우를 이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죄를 변명할 정도면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유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죄의 실체에 직면하여 회개하는 것이 살길입니다. 언제나 영적으로 깨어 있어 죄로 인하여 죽는 일이 없도록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