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7:25~40)②[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고린도전서 7:25~40)②
임박한 환난으로 인하여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임박한 환난 때문이란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두고서 이 세상에 임할 대 환난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환난은 전무후무한 것으로서 이때에는 특히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같은 바울의 견해는 환난 날에 장가가고 시집간 자들에게 미칠 육신의 고통을 염려한 데서 나온 말이지 절대 결혼 자체를 업신여긴 데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남자건 여자건 혼인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요구보다 자신들의 배우자 요구에 더 관심을 두지만 독신자들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더 관심을 둘 수 있습니다.
39, 40절에 나타나는 과부의 재혼 문제에서도 바울은 재혼하든지 하지 않든지 두 가능성을 다 인정하며 본인의 자유로 결정할 것을 말합니다. 재혼한다면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으로서 믿는 자와 할 것이고, 또 그대로 독신으로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 판단이 자신의 것이지만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로서의 판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과부의 재혼에 대하여 허용하는 것이며, 예수님은 이혼녀의 재혼을 금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예수의 재혼관은 일치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이 재혼에 관한 가르침들이 율법적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성경적 어긋남이 없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절대적 뜻 안에 있던 결혼에 대한 의도는 절대로 나뉠 수 없게 되어 있는 영원한 ‘한 몸’의 실제가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안에 있는 구속의 의지는 우리 인생들의 연약함을 채워주시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인간의 부부 관계는 죽음으로써 끝나는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맺은 부부 관계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영원히 지속하는 불변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배우자를 얻은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를 나의 영적 배우자로 얻은 것에 대하여 기뻐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바울이 허용한 과부의 재혼은 기독교적 원리 즉 남녀평등의 정신과 일치합니다. 여자의 재혼을 허용하지 않고 미망인의 정조를 강요하던 동양의 유교적 전통과는 달리 바울은 여자의 또 다른 선택과 삶까지도 존중하고 있습니다.
과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재혼이냐, 홀로 지내느냐의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주 안에서 이루어진 삶이냐 아니냐가 더욱 중요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는 바울이 본 장에서 계속 언급해온 결혼, 독신, 이혼 문제에서부터 문제의 핵심으로 등장한 것인데 이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깨달음이 있기 위함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의 근본 의미이며 본 장에서 바울이 지속해서 강조한 참 신앙인의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모든 일에 주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결혼하고 나면 배우자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여야 합니다. 반대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든 관심과 힘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결혼하고 싶다면, 다만 ‘그리스도인과 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처럼 임박한 환난 중에 살고 있지는 않았지만 원칙은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배우자를 선택해야 옳습니다. 자녀의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며, 선택하는 일에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기보다 주님을 바라보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