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꽈벼기 2020. 4. 11. 08:00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가복음 15:33~47)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고 극한 육체적 고통을 당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예수님의 인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인 동시에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아픔을 체험하셨던 것입니다.


반면 가상 칠언 중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그 사명을 완수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정오 제육 시부터 온 땅에 어둠이 뒤덮였습니다. 이 흑암은 구세주를 죽이기까지 한 유대인들의 사악한 심령 상태를 나타냄과 아울러, 완악한 불신자들에게 마련한 캄캄한 흑암의 장소를 암시합니다. 아울러 이 어둠은 예수님을 이토록 엄청난 고난에 처하게까지 만들었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주목할 사실은 예수님께서 운명하시자마자 성소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는 점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약의 의식적 율법이 종결되고 하나님께 나아갈 새로운 길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 예법에 따라 대제사장의 중재로써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 직접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던 죄의 장벽이 예수님의 대속 죽으심으로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금요일 저녁의 해가 지면 바로 안식일이 시작되므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두기를 꺼리며 빌라도에게 치워주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군병들을 시켜 두 강도와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토록 했습니다. 군병들은 두 강도의 무릎을 꺾어 죽였으며, 예수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이어서 간소한 장례 절차가 진행되는데 예수님을 장사지내는 일에 앞장섰던 자가 베드로를 위시한 열두 제자들이 아니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는 부자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위기의 현장에 감연히 나서서 예수님을 장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토록 예수께 충성을 맹세했던 베드로마저 종적을 감춘 무시무시한 형장에 예수님께 걸었던 세상 적 기대가 깡그리 무너지고만 좌절 형장에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사회적 명망과 부귀와 심지어 목숨마저 다 빼앗길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예수를 장사하겠노라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의 본질을 바로 알았는지 혹은 그분의 부활 예고를 그대로 믿었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의 위대하신 인격에 압도당하였고 공생애 동안 베푸신 예수님의 여러 말씀에 내포된 소망을 버리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 되신 것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대신 장사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악과 허물로 가득한 옛사람을 장사지내고 의와 생명으로 가득한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에 진실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무덤 속에 장사지낸 바 된 시체와 같은 옛사람에게로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백부장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십자기를 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확신하길 원합니다. 나의 삶도 어쩌면 큰소리치는 제자들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섬기는 여인들처럼 그렇게 섬길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크신 회생을 감사드리며 여성들의 헌신적인 섬김에 감동하길 원합니다. 늦었지만 아리마대 요셉처럼 당찬 장례 마무리도 놀랍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며 어떤 일을 헌신하기에 늦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