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마가복음 11:20~33)②
20~26절, 예수님의 이적인 권능이 제자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음을 확증하는 말씀입니다. 다만 이러한 권능을 체험하기 위해 한 가지 분명히 전제해야 할 사항이 있으나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을 자신의 신념을 고집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우를 범합니다.
믿음의 간구란 자기 자신의 인간적이고 세상의 욕망을 채워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부패한 마음을 비우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분별하여 그 뜻을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으로써 주께 간구할 때 주님은 분명히 이 모든 간구를 낱낱이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또한,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 기도드리기 이전에 먼저 이웃과 화목할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못지않게 인간 상호 간의 관계도 중요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고 하면서 주위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지극히 이기적이거나 스스로 거짓말하는 자나 다름없습니다.
또한, 기도하기 전에 먼저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은 간구의 근거가 용서, 곧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은 용서임을 암시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하나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27~33절, 여기에서 산헤드린 회원들이 제기한 질문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공개하신 바 있으며 오직 하나님께만 가능한 죄사함의 권세를 지녔노라고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 이에 대적들은 이것을 빌미로 예수께 신성모독의 죄명을 뒤집어씌우고자 계교를 부렸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신성모독은 극형을 의미합니다. 진실로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는 인생이 풀어야 할 가장 중차대한 과업입니다. 그러나 대적들은 ‘예수의 권세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혹은‘예수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진실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고민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 살해 방침을 기정사실로 굳혀둔 채 단지 유대 군중들이 이해할 만한 증거 자료를 찾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요컨대, 본 논쟁은 여타 논쟁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신분 자체와 직결된 것이라는 점에서 다가오는 위기의 절정을 암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산혜드린 회원들은 예수님께서 정식 교육 절차를 받은 적도 없고 유대교 내에서 지도자로 공인받은 적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생각에는 마치 예수님께서 기존의 유대교를 훼파하고 새로운 이단적 당파를 결집하려는 도전 세력으로 여겨졌고, 그뿐만 아니라 감히 하나님의 권세를 지닌 것처럼 가장하는 참담한 종교 사기극을 행하는 자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께 저주받아 말라 죽어간 무화과나무 사건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결실 없던 유대교 지도자들의 죄 곧 곁과 속이 다른 그들의 추악한 위선을 고발하셨습니다. 그와 더불어 선민이라는 찬란한 이름만 지니고 있을 뿐 그 이름에 조금도 부응하지 못하던 무기력한 유대 백성들의 허물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바로 우리에게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찾아오신다면 내 모습을 보고 뭐라고 말씀하시겠는지 생각해 봅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위하여 얼마나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있는지 되돌아봅니다. 나의 마음을 살펴보고 주님의 사랑과 심판에 바르게 반응하길 원합니다. 기도할 때 과연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구하길 원하며 나 자신을 속이지 않고, 믿음으로 말씀 따라 살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