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창세기 3:1~24)
1~5절은 인간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순종의 기회를 오히려 하나님을 불신하고 배반하는 불순종의 기회로 전락시키고 만 비극적인 인간 타락의 기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말 잘 듣는 애완동물이나 혹은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로봇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 의지를 가진 책임 있는 존재이자 발전하며 성숙해가는 인격체로 만드셨습니다.
인간에게 사단은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인간의 지위와 명예를 왜곡된 교만으로 부추기면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아는 초월적 존재가 되지 않겠느냐고 유혹함으로 인간을 죄를 범케 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단의 유혹 배후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허용이 전제되었겠으나, 인간이 순종과 신뢰의 기회를 저버리고 불순종으로 죄를 범한 데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채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인간의 교만이 주요인이었습니다.
여기서 시험과 유혹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시험에는 인간을 성숙시키려는 하나님의 선한 의지가 자리 잡고 있으나, 유혹에는 인간을 타락시키려는 사단의 악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담을 더욱 성숙한 인격체로 만들기 위해 시험을 허용하셨으나, 아담은 육체적 욕심과 교만에 사로잡혀 사단의 유혹에 말려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로써 인간에게는 죄로 인한 타락과 죽음의 역사가 펼쳐지게 됩니다.
6~13절은 사단의 유혹에 빠져버린 타락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 묘사된 장면입니다. 수치, 공포, 핑계로 점철된 일그러진 인간상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날 때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실로 모든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데서 발생합니다.
희망과 생명과 사랑이 엄청났던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는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이제 더 이상의 즐거움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서로 간의 반목과 책임 회피 및 왜곡된 성 의식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는 태초 하나님과 인간 간에 이루어진 아름다운 창조 질서 및 위계를 불신과 교만으로 깨뜨려 버린 인간에게 남겨진 악의 부산물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과 조화로운 삶을 깨뜨릴 때 인간 상호 간의 조화 및 인간과 피조계의 조화는 여지없이 깨어지고 맙니다.
한편 본문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비극은 회개에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겸손한 고백과 크게 뉘우치는 눈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저주받게 된 더 큰 요인인지도 모릅니다. 실로 참된 회개는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가장 큰 소망을 가져다주는 구원과 생명의 문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4~21까지의 말씀을 통해 비로소 현 인류와 자연계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의 원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를 범한 자들은 각자를 합리화하며 하나님의 징벌을 모면하려 하였으나, 모든 만물의 깊은 것까지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재요 심판자로서 죄를 범한 자들의 행위와 양과 정도에 따라 정확하게 심판하셨고, 이를 통해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도구가 된 뱀을 가장 미천한 존재로 전락시키시고, 그를 이용한 사단에겐 여자의 후손으로 일컬어지는 메시아와 영원한 원수 관계가 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향후 전제되는 역사는 바로 이 두 세력 간의 투쟁사로도 볼 수 있는데 궁극적으로 메시아의 승리로 귀착됩니다.
여자에게는 임산의 고통을 주셨으며 남편의 권위 아래 영구히 귀속되도록 하셨습니다. 사실 출산은 본래 인간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축복이자 명령이었으니 죄로 인해 무서운 고통이 수반됨으로써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담에게는 고통스러운 노동과 그에 따른 빈약한 생산성 및 필연적으로 죽어야 하는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그가 인류의 대표자라는 점에서 그의 고통과 죽음은 인류 전체의 고통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만물의 관지자요 대표자라는 측면에서 인간과 더불어 만물도 함께 고통 받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타락 후 창조 세계와 인간은 서로 조화롭고 유익을 끼치는 관계가 아니라,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 및 조화롭지 않은 관계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비극적 상황은 예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 건설의 위업이 완수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된 후에는 인간과 자연계를 얽매고 있던 모든 비극적 요인들이 사라지고 새 질서 안에서 에덴의 기쁨을 다시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역사의 주인은 타락한 인간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일망정 하나님 나라 일군으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2~24절에서는 사단의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한 인간이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쫓겨나는 장면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통치 질서를 무시한 인간들은 죽음과 낙원 상실, 양심과 도덕성의 부패 및 하나님이 제공하신 모든 행복을 순식간에 잃어버리는 비운을 맞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은 하나님과의 교제 단절이었습니다. 진정한 행복과 삶의 의미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역으로 하나님과의 교제 단절은 절망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주받은 인생과의 직접적인 교제는 단절시키셨지만, 그 관계를 영원히 청산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역설적인 예로서 생명나무에의 접근을 막기 위해 낙원에서 그들을 추방하신 일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범한 인간들이 생명과실을 먹고 고난과 바탕으로 일관된 생을 영원히 존속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엄청난 형벌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낙원에서 그들을 쫓아내신 것은 저주와 더불어 사랑을 내포한 신적 배려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의 문을 굳게 닫으셨지만, 반면 천국의 문을 활짝 여시고 인간 구속의 역사를 새롭게 주도해 가신 것입니다.
◆변모되고 변명하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에서 인간의 죄악 된 본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깊이 깨닫고 자신의 신앙을 더욱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려 죄를 범하지 않는 성결한 신앙인이 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우리가 참으로 돌이킬 때까지 우리를 돌아보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며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예수를 보내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겠다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나 사람은 사랑하십니다. 또한 징계하시더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십니다.
●사탄의 유혹을 간파하려면 그만큼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읽는지 돌아봅니다. 원수들의 사악한 꾀를 분별하고 거절하는 지혜와 능력을 갖춰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가리는 일이 없기를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로와 손길과 장차 올 영광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 앞에 감추려고 하는 죄악들을 들추어내어 고백하게 하시기를 소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