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아들은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꽈벼기 2019. 11. 17. 07:41

[아들은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말라기 1:1~14)

 

1~5,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망각한 이스라엘에 대한 책망입니다. 여기에서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깊은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한편, 저자는 본문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어법에서 사랑은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랑이 좀 더 넘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본문에서 표현한 사랑은 절대적인 개념으로, 야곱과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서로 비교될 수 없는 확연히 구분된 것임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약에 근거한 것으로서 영원히 변치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표제 1절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단어는 경고입니다. 앞서 본서의 기록 목적이 하나님은 여전히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라는 불변의 언약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내용과 경고라는 단어와는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경고라는 단어는 사랑보다는 심판과 더 밀접한 연관이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저자가 표제에서 사용한 경고는 심판을 위한 경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말씀으로 권면하신다는 사실을 글의 첫머리에 밝히는 것입니다.

 

2a절에서 첫 번째 논쟁의 서언인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라는 하나님의 선언 속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약에 기초하고 있음으로 어떤 경우에도 절대 변경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본서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심을 선포합니다.

 

2b절에서 하나님의 선포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은 무지함그 자체입니다. 그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이 백성들의 질문을 통해 당시의 종교적, 사회적 상황을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한마디로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질문이 하나님께 대한 범죄임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이처럼 영적 무감각은 당시 백성들이 총체적으로 부패하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2c~5절에는 하나님은 백성들의 우매함과 당돌한 질문까지도 사랑으로 감싸 주시며,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야곱과 에서의 비유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통해 자신의 주권적 선택을 알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를 미워하였다라고 하심으로써 무조건적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본문은 사랑미움언약적 언어로 설명함으로써 선택 안에 있는 절대 멸망하지 않음을 거듭 밝히고 있습니다.

 

6~14, 두 번째 설교로서, 형식적인 제사를 일삼는 제사장들의 타락에 대한 책망과 하나님의 탄식이 선포되어 있습니다. 말라기 당시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불순종하고 거짓을 가르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흠 있는 제물과 병든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영적 지도자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책망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한 예배를 드리도록 촉구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주인과 종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부자 관계의 비유는 언약 초기부터 계속된 것으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주인으로 묘사한 것은 하나님이 공경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임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인간은 진정한 두려움이 있을 때 악에서 떠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에 대한 최소한의 공경도,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선지자는 지도자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어 책망함에 앞서 그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함으로 회개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라는 교묘한 질문으로 자신들의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당시 제사장들의 하나님에 대한 모독과 불순종의 도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제사장들의 구체적인 죄로서 하나님의 제단을 더럽힌 것입니다. 그들은 눈멀고, 저는 병든 더러운 짐승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고의적이고 습관적으로 더러운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저자는 제사장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희생 제사를 멸시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한 것임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영원히 멸시를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조건만을 찾는다면 모든 것이 다 감사할 조건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께 늘 불평하고 원망만 한다면 모든 것이 다 불평 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 중 어느 것이 성도의 삶이어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런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날마다 풍성히 허락하시는 은혜를 기억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제가 무엇이 관대 어찌 이처럼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시나이까!’라고 감격,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혹시 하나님을 경멸하는 죄를 범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함으로 주님을 더욱 섬기기를 기도합니다.